갚을 수 없는 빚 / 김영관
열네 살 때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을 못한 나는 아침 일찍 난전에 장사 가신 엄마 대신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을 때였다.
머릿속에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아 힘겹게 눈을 떴다. 병원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지 의아했다. 간호사가 이마를 짚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어제 적산가옥 삼 층 지붕에서 떨어진 기왓장에 머리를 맞아 아스팔트길에 쓰러져 있는 나를 지나던 군인이 업고 병원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막내가 낮잠을 길게 자고 있었다. 갑자기 적산가옥 일 층에 있는 만화방 가게 유리문에 붙은 만화 그림이 보고 싶었다. 그 적산가옥은 삼 층으로 다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비가 올 것 같아 빨리 만화 그림을 구경하고 돌아올 욕심에 나는 신작로를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만화방 유리문 앞에 서서 그림 두 장을 본 것까지가 기억의 끝이었다.
그런데 묘했다. 가만히 눈을 감자 꿈속 같은 기억 한 점이 가물가물 거렸다.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웅성거림 속에서 한마디 말이 아침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귀에 닿아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역시 군인이 최고네.” 아마도 길바닥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의식을 잃은 나를 지나던 사람들은 어쩌지 못해 쩔쩔매는 상황에서 군인이 나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온 것이 분명했다.
며칠이 지났다. 머리 상처도 아물고 어지럼증도 회복되었다. 하지만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병원비 걱정에 조기 퇴원을 애원하는 엄마에게 의사 선생님은 며칠 지나면 다리 마비도 서서히 나아질 거라며 퇴원을 허락했다.
집에 온 나는 열흘이 지나도록 앉은뱅이였다. 바깥출입이 불가능했다. 동생들에게 밥해 먹이고 빨래를 해야 하는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난전 계단 귀퉁이를 지켜야 하는 엄마에게 내 다리마저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었다.
장대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나를 업고 수소문해둔 침술원을 찾아갔다. 집에서 약 한 시간이 걸렸다. 낡은 우산을 내가 받쳐 들었지만, 엄마와 나는 머리 부분만 빼고 비에 흠뻑 젖었다.
침술원 미닫이문을 밀던 엄마는 문 앞에서 멈칫 멈칫거리며 안으로 들어서지를 못했다. 꽤 넓은 다다미방엔 배에 대침을 꽂고 누워 있는 환자가 빽빽했다. 그들이 숨을 쉴 때마다 긴 침 머리가 나룻배의 노처럼 끄떡끄떡 거렸다.
두 번째 방의 미닫이문을 밀었다. 그 방에는 더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손에 침을 꽂은 사람, 발에 꽂은 사람, 무릎에 꽂은 사람, 머리에 꽂은 사람들이 저마다 편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들고, 뻗고, 엎드리고, 기대고,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나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 나를 엄마는 완력으로 잡아끌며 진료실이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세 번째 방이었다. 몇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술사는 눈에도 혈색이 좋고 풍채가 뛰어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 앞 남자 환자의 코에 한 뼘이 넘는 긴 침을 밀어 넣곤 침 머리를 비볐다. 남자의 코에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죽은 피’라는 할머니 말대로 피 색깔이 검은색이었다.
내 차례였다. 엄마의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나의 왼쪽 다리를 당겨 몇 번 움직여보시곤 내 머리를 당겼다. 그리곤 정수리에 손가락으로 뼘을 재가며 지구본을 그리듯 둥글게 침을 놓았다. 침을 찌르곤 침 머리를 비볐지만 겁먹은 것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머리에서 시작한 침은 목, 허벅지, 무릎, 복사뼈 순으로 왼쪽 관절 부분에 원을 그리며 놓았다.
그리곤 발등에 두 개의 침을 꽂아두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넷째 발가락과 새끼발가락 사이에 침을 찌르는 순간 아픈 통증에 나도 모르게 왼쪽 다리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주위 사람들이 감탄을 했다. 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나를 놀리셨다.
“네 이놈 쌀 한 섬 지고 와야 한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기가 통했지만 육 개월은 매일 침을 맞아야 한다고 당부를 했다. 보름이 지나자 지팡이에 의지해 혼자 침을 맞으러 갈 수 있었다. 침을 맞기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나자 나는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는 세월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았다. 높이뛰기를 할 때나 돌다리를 건널 때는 오른발보다 왼발이 한 뼘 이상 거리가 부족했다. 좁은 다리 위나 산길을 걸을 땐 왼발의 중심이 불안정해 휘청거릴 때도 있었다. 정강이 굵기도 왼쪽이 확연히 얇았다. 인체의 세포는 칠 년마다 재생된다고 했지만, 성장기인 열네 살 때 약 20일간 왼쪽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평생 그만한 차이는 안고 살아야 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회생한 나는 철없이 지내다 어른이 되어서야 마음 한구석이 늘 무거웠다. 몸이 왜소한 엄마가 다 큰 나를 업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침술원까지 보름 동안 다녔는데,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해준 군인과 다리를 고쳐준 침술사에게도 정중한 감사 한번 드리지 못한 것은 평생 마음의 빚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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