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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이판사판(理判事判) / 홍혜랑

 

 

이판사판(理判事判) / 홍혜랑

 

 

산사(山寺)의 겨울밤을 어찌 어둡다 하리.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선명하면 할수록 더 멀리 느껴지는 건 색다른 체험이었다. 멀리 있을수록 그리움이 더한 것이 어찌 별뿐일까. 고개를 하늘로 젖히니 걷잡을 수 없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몸을 방어할 길이 없다. 별이 나를 마구 잡아당긴다.

​살갗에 닿는 청량한 대기 또한 어둠을 씻을 만큼 상쾌하다. 이 무명(無明)의 영혼에게도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이번 문화유적 답사팀이 숙소를 호텔이나 콘도 대신 절간의 선방(禪房)으로 정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별들과의 만남도 소중했지만 잠시 방문한 과객(過客)들에게 법문을 허락한 주지스님과의 인연이 있어 이번 여행이 더욱 기억에 남아 있는 듯하다. 일행 중에는 나를 포함한 기독교인이 꽤 많았지만 구도자의 덕담을 듣는데 종교의 이름을 문제 삼는 옹졸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 앞에 나타난 주지스님은 중년의 나이에 이지적인 학자의 인상을 풍겼다. 그런데 인상과는 달리 그의 법문은 인간의 지극히 형이하학적인 삶의 면면을 담담하게 쏟아냈다. 사심 없는 스님의 고백을 다른 곳이 아닌 선방에 앉아 들을 수 있는 행운이 참으로 흐뭇했다. 도승의 풍자 섞인 자조적 고백에 중생의 웃음소리는 선방의 담을 뛰어넘는다. 아마 이웃 선방에서 용맹정진 수행하고 있을 스님들도 때아닌 나그네들의 웃음소리에 잠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을지 모를 일이다.

먹는 즐거움의 비중은 스님에게도 대단한 것이었다. 스님들의 혀도 우리와 똑같이 미식(美食)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그뿐인가. 선방에서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걷는 동안 한없이 경직된 스님들의 심신은 지대방이라는 휴게실에서 그 유연성을 찾는다고 했다. 젊은 비구 스님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해학이 있어 지대방이라는 공간이 그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사랑방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날 법문의 언어가 형이하학적이었다고 해서 곧 법문이 형이하학적이었다고 기억되지는 않는다.

원로 수필가의 글 속에 나오는 청자연적의 꼬부라진 꽃잎 한 개가 생각난다. 연적에 조각된 똑같이 생긴 꽃잎들 중에 한 개가 옆으로 약간 꼬부라져 있을 때 작가는 이것을 '멋'이라고 불렀다. 그날 스님의 법문도 참 멋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꼬부라진 한 개의 꽃잎이 보는 이에게 멋일 수 있으려면 꼬부라지지 않은, 반듯반듯한 주위의 꽃잎들로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인간의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면모를 가감 없이 묘사하는, 스님으로서는 약간 꼬부라진 위트가 어둡지 않고 오히려 구슬처럼 단아하게 빛났던 것은 오랜 세월 선방에서 갈고닦은 무서우리 만치 치열한 그의 안광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날 법문을 들으면서 많이 웃었다는 기억과 함께 스님이 줄곧 우리의 웃음을 채점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확인하려는 눈빛이 역력했다. 웃음에 가리어 놓쳐버릴 뻔했던 법문의 한 대목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사찰 안에는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라는 역할 분담이 있는데 참선을 하고 경전을 공부하며 도(道)를 닦는 스님 쪽이 이판이요, 절의 살림살이를 맡은 쪽이 사판이라고 했다. 그날 법문하는 스님의 안광에 주눅이 들지만 않았다면 나는 금세 이렇게 질문했을 것이다. '기왕에 인생을 걸고 출가하여 입산수도할 바에야 도를 닦는 이판을 할 일이지 뉘라서 구차한 살림살이를 맡아하는 사판 쪽에 서겠는가'라고 말이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절간의 이판과 사판에 관하여 운(云)을 떼어놓은 스님이 '이판사판'이란 세상의 언어를 끝내 모르는 척 넘어간 점이다. 내 언제고 다시 산사를 찾는다면 꼭 한번 질문해 보리라 마음먹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는지 알 수 없으니 우선 제어할 수 없는 나의 궁금증을 스스로 달래보려 한다.

상황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까짓것, 이판사판이다'라는 중생의 언어가 사찰에 사는 스님들의 역할 분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해탈(解脫)이란 말은 아무나 가벼이 입에 올릴 수 있는 어휘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해탈의 소망 하나만을 빼놓고는 모든 소유를 던져버린 출가 구도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판의 스님이든 사판의 스님이든 그들 모두의 소망은 오직 하나이리니, 기쁨과 슬픔, 영광과 고난, 사랑과 미움, 귀하고 천함, 끝내는 삶과 죽음까지를 둘로 보지 않는 불이(不二)의 문(門), 아니 그 문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문(無門)의 삼매(三昧)에 드는 것이리라. 절간에서 맡은 일이 이판이면 어떻고 사판이면 어떻단 말인가. 이판이 곧 사판이요, 사판이 곧 이판인 것을.

그러고 보면 이판사판이란 말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의 언어이어야 한다. 진리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든 오직 진리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진리를 향한 절대적 자기 개방의 언어 말이다. 하지만 초(礎)나라의 귤 나무가 제(齊)나라에 가면 탱자가 된다던가. 절간의 이판과 사판에서 태어난 이 말을 입에 올리는 중생은 오히려 진리를 밟고 넘어설 기세다. 어리석은 중생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진리에게 자기 자신을 맡기느니 차라리 진리보다는 자기가 더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할 수 있다고 믿어서일까.

세월은 나에게도 이순(耳順)의 성숙함을 강요하며 죄어오는데 아직도 화이트칼라, 블루칼라를 편가르며 양쪽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고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고 있었다. 그날 법문하던 스님께 던지고 싶었던 질문을 입 밖에 내지 못했으니 망정이지 근기(根氣) 낮은 나의 무례함을 어찌할 뻔했나. 이 천형(天刑) 같은 분별의 인습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롭고 싶은 뿌리 깊은 염원이 엉뚱하게 자의적(恣意的)일 수도 있는 언어 해석에 이르게 한 것 같다.

해탈과 나 사이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도 수억 광년이 걸린다는 저 별만큼이나 멀고 아득할지 모르나 밤하늘의 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리움의 가슴이야 어찌 죄 있다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