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친구들 / 김규련
말 많은 세상에 너희들은 말이 없다. 말이 없어서 무한한 말이 있음을 내가 안다. 해서 나는 귀한 친구로 대접한다. 너희들에게도 봄이 왔다.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봄을 맞아 너희들의 몸짓이 눈부시다.
너희들은 언제부터인가 나의 가솔이요, 삶의 동반자요, 묵언의 동반자가 되지 않았던가. 나는 높고 낮은 등고선을 넘어 그늘과 별과 바람을 지나 이제 망구(望九)의 초입에 다다랐다. 세속의 분별과 속도의 물결에서 물러선 이 촌로는 어쩔 수 없이 고독을 벗 삼아 즐길 수밖에 없다. 몸은 이미 금 간 독 같고 뇌는 구새 먹은 고목처럼 굳어져 있다. 이런 나이에 아침마다 살가운 미소로 반겨주는 너희들이 있어 고졸한 내 생활에 기쁨이 그윽하다.
하나 나는 역시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라 때때로 마음이 흔들려서 번뇌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묵상과 기도로 탈출을 시도해 본다. 때로는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너희들에게 다가가서 내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사람과는 달리 너희들의 시공에는 거짓도 위선도 탐욕도 없다. 선악도 귀천도 없는 순수 그 자체이다. 그 순수 속에 한참 몰입해 있으면 속진의 때는 스스로 무산해 버린다. 나의 영혼과 너희들의 생혼(生魂)이 우주에 충만한 영적 파동에 함께 감응해서 하나가 되는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은 중중무진으로 서로 얽혀서 하나의 큰 생명체에 연결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너희들은 함께 어우러져서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세한삼우(歲寒三友)인 송, 죽, 매분이 있는가 하면 산천보세, 관음소심, 철골소심, 십팔학사, 제주한란 등 난초가 있다. 산다화며 영산홍이 있는가 하면 소사나무며 느티나무며 관음죽도 있다. 왁자하게 꽃 피고 푸른빛 넘실대는 봄여름에는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아 곰살가운 풍류와 낭만이 넘친다. 서리 묻은 기러기 떼가 하늘 높이 떠가고 눈바람 내리치는 가을 겨울에는 옹골찬 기개와 꿋꿋한 자태가 오롯해서 고혹미 마저 느껴진다. 너희들에게도 마음이 있고 혼이 있다. 기억력도 있으며 인간의 애증을 알고 죽음을 예상하여 실신도 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다.
매화 한 송이 뚝 지는 낙성(落聲)을 듣다 말고 느닷없이 퇴계의 한 시구를 떠 올린다.
“내 전 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이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뒤 따라서 장자의 명징한 설파도 생각난다.
“애당초 깊고 그윽하며 유미(幽微)한 세계에서 자연의 기를 받아 탄생한 생명이 수많은 식물과 동물로 전생하다가 최후에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 인간이 다시 최초의 유미한 세계인 자연으로 돌아간다.” 어느 생에서 너희들이 사람이고 내가 식물이었을 때 만나고 헤어졌던 하얀 옛 기억이 불현듯 짙은 향수로 피어오른다. 옛사람들은 자연을 지혜의 보고로 여겼던 것 같다.
군신 간의 의리는 벌에서
병법에서 진(陣) 치는 법은 개미에서
질서 유지에서는 기러기 떼에서
집 짓는 데는 까치에서
그물 치는 법은 거미에서…
보고 배우고 지혜를 터득했다. 하나 이제는 문명이 자연을 밀어내고 이를 대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명의 과욕은 자연을 깨트리고 찢고 더럽혀서 무서운 재앙을 부르고 있다. 지구의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말이 없어도 침묵의 행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인간의 엄청난 욕심을 꾸짖는다. 지구는 모든 생명체의 공유물인데 왜 인간이 독점해서 동반자살을 자초하는가 한다.
너희들은 가만가만 서있어도 부단히 변하고 또 변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고 오늘과 같은 내일이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태양을 중심으로 자연의 섭리는 만고불변이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매화나무가 아무리 변해도 느티나무가 될 수 없고 난초가 관음 죽이 될 수도 없다. 존재의 본질은 소멸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나고 죽고 흥하고 망하는 것이 덧없다는 무상(無常)을 즐겨 봐 왔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세상사를 미리 알고 초연하고자 했다. 나는 늘 범부의 치망(痴網)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도 아무런 변화 없이 항시 그대로 있는 상주(常住)를 보는 데는 소홀했던 것이 부끄럽다. 사람은 가도 그가 남긴 발자취는 변하지 않는다. 티끌 같은 진실이 변하지 않고 태산 같은 허구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둔피(遁避)의 오지에서 다시 광야로 나와 하늘과 땅과 사람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할 터이다. 느림의 여유, 느림의 사색, 느림의 미덕을 즐기면서.
너희들은 기나긴 엄동(嚴冬)의 한고(寒苦)를 견디고 활기를 되찾아 꽃을 피우고 있다. 한데 또 봄은 가고 있다. 낙화(落花)와 소멸의 그림자가 영원한 회귀(回歸)를 고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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