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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첫 월급 / 조일희

첫 월급 / 조일희

 

 

"엄마 계좌번호 좀 알려주세요."

첫 월급을 탔단다.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녀석이 어느새 직장인이 되어 용돈을 보낸다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무엇보다 원하던 대학에 입학을 했을 때 '졸업 후 취직을 하면 첫 월급을 엄마에게 주겠다.'던 약속을 잊지 않은 아들이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30여 년 전, 취직을 위한 면접을 보러 가던 때가 생각났다. 예나 지금이나 면접을 보러 간다면 값이 비싼 옷은 아니어도 단정한 차림새로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나 곤궁한 처지였던 터라 마땅한 옷 한 벌이 없어 난감했다. ​할 수없이 친구의 연두색 예복을 빌려 입고 면접을 보러 갔다. 옷이 잘 맞지 않아 면접관 앞에 서기 전부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자신감이 떨어지니 알고 있던 답도 머릿속에서 웅크리고 나오질 않았다. 면접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마치 옷 때문에 떨어진 것 같아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울었다. 보다 못한 엄마는 어디 가 돈을 빌려 오시더니 시장 안에 있는 허름한 양장점에 가서 투피스 한 벌을 맞춰 주셨다. 맞춤옷 덕분인가 얼마 후 괜찮은 곳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첫 월급을 받던 날, 친구들처럼​ 종로에 있는 유명 매장에서 하늘거리는 원피스 한 벌 사 입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야속하게도 받은 월급을 다 내놓으라 하셨다. 미국 유학 중이던 오빠 때문이었다. 다른 집은 맏이가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제 학업도 중단한다던데, 어떻게 우리 집은 막내인 내가 오빠를 위해 생활비까지 보태 주냐고 항변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원피스는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그 후로도 사고 싶은 구두며 옷가지에서 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했다.

어느 날 엄마는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오셨다. 양복점에 걸려있는 옷이 오빠가 입으면 어울릴 것 같아 사 오셨단다. 그 순간 딸의 속을 너무도 몰라주는 엄마가 너무나 야속했다. 그 자리에 없는 오빠까지 덤터기로 미웠다. 그 시절의 서운했던 앙금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얼마 전 오빠 아들이 제법 알려진 회사에 취직을 했단다. 첫 월급을 탄 조카는 가까운 친척들에게 백화점 상품권이 든 봉투를 일일이 돌렸다. 그중에서도 내가 받은 봉투는 다른 사람들이 받은 것과 급이 달랐다. 동생 덕분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옛날의 고마움을 자식들에게까지 털어놓았던 모양이었다. 오빠는 그동안 여러 차례 미안했다고, 자기만 생각했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집안의 자랑감이 된 오빠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을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오빠와 조카의 정성어린 마음을 받고 보니 내 작은 희생이 그래도 조금은 의미가 있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는 취직. 다행히 아들은 의대 졸업 전에 대전에 있는 병원으로 자리가 정해졌다. 학생 때와 달리 얼마나 고되고 힘든 생활 일지 짐작이 되는 터라 전화 통화하는 것조차 신경이 쓰였다​. 이사한 집에 한 달이 다 되도록 오지 못하는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내가 길을 나섰다. 한참을 1층 병원 로비에서 기다린 후 만난 아들은 얼굴이 홀쭉해져 있었다.

"내 새끼 왜 이렇게 말랐어. 엄마 밥 먹고 다닐 때가 좋았지?"

얼굴을 쓰다듬는데 마음 한구석이 아려 온다. 녀석은 말없이 씨익 웃고 만다. 먹고 싶다던 쇠고기를 양껏 먹이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아들, 지금까지 잘해 왔듯이 앞으로도 잘하리라 엄마는 믿는다.' 아들에게 들리기라도 하는 냥, 소리 없는 응원을 마음속으로 크게 외쳐보았다.

"엄마, 통장 확인해 보세요."

약간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로 확인을 할 수도 있으련만 일부러 은행에 가 통장에 찍힌 녀석 이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난생처음 아들에게 받은 돈, 마음이 촉촉해져 와 눈을 뗄 수가 없다.

문득 내 첫 월급을 빼앗듯이 달라시던 친정어머니가 떠올랐다. 철없던 내 눈에는 엄마가 잘난 아들만 챙기는 것 같아 그토록 속을 헤집어 놓았었으나 막상 자식이 주는 용돈을 받고 보니 30여 년 전 복잡했을 엄마의 심사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엄마, 엄마도 이런 마음이셨죠?"

아들 선물을 받고서야 그 모정을 헤아리는 내가 참 미욱스럽고 부끄러웠다. 오랫동안 쌓여있던 앙금도 말끔히 씻겨 내리는 듯하다. 다음 주 집 구경 오시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준 용돈으로 선물 하나 안겨 드려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