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잔 / 小珍 박기옥
맥주 한잔을 즐기는 편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술을 마실 때도 있지만 불현듯, 간절히 한잔 하고 싶을 때는 맥주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럴 때는 그야말로 딱 한잔이 제격인데, 캔이거나 병이거나 한잔을 넘기 일쑤여서 불편할 때도 있다. 양을 조금 줄여서 값도 약간 내리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안 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간다. 남은 술을 버리기도 무엇해서 다 마시게 되면 속도 편치 않고 기분도 좋지 않다.
시집 살 때 어느 순간 간절히 맥주가 한잔 마시고 싶어 혼자서 캔을 뜯은 일이 있었다. 딱 한잔만 하고 나머지를 책으로 잘 덮어 놓았는데, 나중에 보니 못쓰게 되고 말았다. 그 후로는 누군가를 붙들고 함께 마시게 되었다. 대상이 아들일 때도 있었다.
아들이 고3 때 야간자습 후 집으로 데리고 오던 중 포장집에서 맥주 딱 한잔만 하고 싶었다. 나는 아들에게 냄비우동 한 그릇 사 주마고 꼬드겨 포장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맥주도 한병 시켰다. 그 한잔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
남은 술을 아들이 마시고 기분 좋게 집으로 들어왔는데, 옷을 벗던 아들이 빙긋 웃으며 엄마는 내일 모의고사 치는 아들을 술 먹인다고 흉을 보았다. 요즘은 제법 꾀가 나서 남은 술을 화초에 주기도 한다. 화초 역시 혈액순환이 필요하여 물에 타서 주면 좋아한다.
비록 맥주 한잔이라도 취향이다 보니 나 데로의 기준 비슷한 것도 있다. 그 첫째가 맥주잔이다.
나는 맥주를 시킬 때 '깜짝 놀랄 만큼 차가운' 술을 주문하는데, 잔도 역시 차가운 것을 원한다. 단골집에서 주는 살얼음이 살짝 낀 차가운 잔을 보면 기분까지 짜릿하여 술 맛도 좋다.
그다음이 안주이다. 맥주에는 역시 마른안주나 과일, 또는 야채나 건어 종류가 제격이다. 음식이나 술에도 궁합이 있는 모양이라 얼큰하고, 맵고 짠 국물류 안주는 소주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한다. 그러다 보니 안주류 음식을 보면 어울리는 술을 연상하는 버릇이 있다. 감자 칩을 보면 양주가 생각나고, 대구찜을 보면 정종이 생각나는 식이다.
어느 명절 무렵 친정에 갔더니 선물 들어온 것 중에 나막스가 끼어 있었다. 탐을 내는 나를 보고 친정엄마가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해 먹는 반찬이냐고 물었다. 튀기거나 찜을 하면 술안주로 일품이라고 대답했더니 아이들이 엄마는 무슨 반찬이든지 술하고 연결시킨다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웃는 바람에 밥 먹다가 물 더 가져오라는 말을 술 더 가져오라고 잘못 말하여 다시 또 웃음이 터졌다.
언제였던가. 친구들과 넷이서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마실 것을 제공하는데 생수와 몇 가지의 주스 옆에 놓인 캔 맥주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 호텔에 가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샤워 후 한 잔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스 대신 맥주 하나를 받았다. 그것을 보던 두 친구도 캔 맥주를 하나씩 챙겼는데, 받고 보니 보관 방법이 애매하였다. 주머니에 넣었다가, 가방에 넣었다가 제법 분주하였다.
문득 한 친구가 '기내 음식을 밖으로는 못 가져갈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참으로 현명하고 올바른 지적이었으나 우리는 갑자기 복잡해졌다.
맥주를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
무어라고 설명하며 돌려줄 것인가.
다른 친구가 '사실대로' 말하자고 제안하였다.
사실대로 어떻게?
숨기고 나가서 호텔로 가져가려 했다고?
궁리 끝에 우리는 설명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스튜어디스가 지나가자 조용히 맥주를 돌려주었다. 그저 말없이 교양 있게 웃으면서 ---.
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맥주 4캔을 다시 가져다주었다. 차가운 걸로 바꿔 달라고 이해한 모양이었다. 만지작거리다가 따뜻해져 버린 아까 것과는 달리 '깜짝 놀랄 만큼' 차가운 맥주였다. 안주용인지 땅콩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은밀한 미소를 교환하며 건배를 나누었다.
세상에는 이런 비밀도 있는 것을 ---.
맥주는 얼음처럼 차갑고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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