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 강천
폐허 위에 서 있다. 흔적만 남은 옛 절터에는 개망초가 주인 행세를 하며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산 아래 구형왕의 돌무덤을 거쳐 온 바람이 망국의 아픈 기억들을 실어다 줄 때마다, 개망초는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반복한다. 마치 사라져버린 왕국에 대한 애도의 조문처럼 하얗게 일렁인다. 왕릉의 수호사찰이었다고 전하는 이곳 왕산사지에, 망국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개망초가 가득하다. 이 기묘한 조화가 세월의 우연일까, 역사의 필연일까.
왕산,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양왕讓王이 신라에 나라를 양도하고, 이곳으로 들어와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산 아래에는 왕릉이라고 알려진 전傳 구형왕릉仇衡王陵이 있고, 산 위에는 왕대王臺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록 고증적 증거는 빈약하지만, 주변 곳곳에 널린 왕과 관련된 지명이나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과히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나는 지금 왕산의 중턱에 있는 왕산사지에 서 있다. 과거의 흔적이라고는 부도浮屠무리와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전부일뿐이다. 첩첩산중 지리산 끝자락의 오지에서 깨어져 버린 망국의 허망한 꿈처럼 주변에 흩어진 기와 조각들이 어지럽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스러져 버린 폐허의 흔적 위에서, 그나마 온전한 모습을 보전하고 있는 부도를 바라본다. 가만가만 부도가 기억했을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역사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가 서글프다. 망해버린 나라이었을지언정, 왕이 머물렀으니 얼마나 많은 백성이 고난을 겪었을까. 자기는 굶어도 왕은 배불리 먹여야 했을 터이고, 자기는 노지에 쓰러져 잘지라도 임금의 침소는 편안했어야 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었을까. 임금을 보좌했을 벼슬아치와 군사들의 먹을거리며 옷가지는 누가 조달했겠는가. 부도의 거친 돌조각 하나하나에 스민 민중의 한탄 소리가 시대를 넘어 나에게 전해진다.
밤이 길면 꿈이 많고, 역사도 오래면 당연히 상처가 많은 것 아니겠는가. 수없이 많은 왕국이 명멸해간 시간 속에서 이런 절터는 흔하고도 흔하다. 그 오랜 세월과 함께 찢어진 상처는 점점 아물어 가고, 이제는 아릿한 흉터를 보면서 옛일을 추억하는 정도라고나 할까. 흐릿해져 가는 부도의 글씨처럼 여기에 스민 한숨도 세월과 더불어 희미해져 간다. 수정궁, 약수, 토성에 이르기까지, 부근에 있었다고 전하는 유적들의 흔적도 더불어 역사의 저편으로 밀려간다. 기억은 시간을 따라 차츰 잊혀가는 것, 이 또한 세사의 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살다 보면 이런 역사의 그림자처럼, 삶의 아픈 흔적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망해버린 회사를 살려보겠노라고 밤낮없이 뛰어다닌 적이 있었다. 기업주가 자취를 감춰버린 회사였지만, 남은 사람의 임금이라도 챙겨볼 요량이었다. 군주를 위해 원치 않은 희생을 강요당했을 백성들처럼, 노동의 대가를 착취당한 노동자의 억울한 심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나간 집착이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돌무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개망초가 다시 하얗게 드러누웠다 일어선다. 깨어진 기와 조각 하나를 주워본다. 뭇사람들의 절절했던 고달픈 삶과 한숨이 보이는 듯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폐허를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이제는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다고 여겼던 마음의 상처가 아릿하게 되살아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이 허망한 공터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아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 삶터조차 지켜낼 수 없었던 허무한 열정이 입은 상처가 덧칠하듯 더해진 탓이리라.
수필가 백남오 교수는 <염천골, 그 황홀한 폐사지의 자유>에서 "황량한 폐사지에서 내가 느낀 것은 자유이고 희망이다."라고 했다. 그는 폐사지에서 '철저히 부서지는 데서 재창조가 일어난다.'는 희망을 보았는데 나는 오늘 이 거친 폐허에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내 상처를 들춰보면서 씁쓸해한다. 한때는 절대적인 가치라고 생각했던 의미나 생각도 언젠가는 변할 수 있다. 망국의 슬픔이 세월 속에서 희미해져 가듯, 내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삭여가야 할 때임을 느낀다. 이제는 마음의 자유와 희망을 재창조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폐허의 끝자락에서 솟아나는 유의태 약수 한 모금이 꿀맛같이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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