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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춘란 / 박종기

 

춘란 / 박종기

 

 

난蘭잎과 풀잎을 구분치 못하고, 난에 대하여 철저하게 문외한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난잎과 흡사한 맥문동麥門冬을 보고 끝까지 난이라고 우겨댔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그걸 확인한 뒤에는 머쓱히 패배를 인정했었지만 그 뒤로부터 난에 대한 나의 관심과 지식은 좀 더 해박해질 수 있었다.

3월 중순이라 해도 아직 싸늘한 기운이 옷깃을 여미는 지난 일요일 오후, 산책 겸해서 동네 노점시장을 둘러보던 길에 춘란이 한눈 가득 들어왔다. ​시골 아주머니 한 분이 용돈이라도 좀 될까 해서 인근 산에서 채집해 온 거란다. 이 난을 가리켜 흔히들 보춘화報春花라고도 부르는데 대게가 봄철에 대궁을 밀어 올려 고층 제일 높은 곳에 꽃을 피운다.

춘란은 동양란 중에서도 한국 춘란이 제일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꽃과 잎의 조화나 그 대조도 다른 동양란(중국, 일본)에 비해 아주 단아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아주 수려한 품​격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고고한 자태 속에는 잎의 섬세한 곡선미라든지, 고매하면서도 의연한 기품을 지닌 정신세계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끌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의 토종 자생 난 인 춘란은 추위에도 강한 편이므로 반 채광이 있는 야생 숲속 아무 곳에서나 무리 없이 잘 자라 주는 편이다. 그래서 그저 평범하게 자라 준 높은 난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너무 흔한 걸로 업신여겨 요놈의 채집을 거부당한 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향이 짙다. 난은 원래 색상이나 줄무늬, 점박이 그리고 꽃잎의 자태나 화형花形같은 예술성과 희귀성을 놓고 그 가치기준을 크게 달리하고 있는 듯하다. 어느 것은 무려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하니 그것의 재산적 가치 또한 엄청나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엔 황금알을 낳는 고부가가치高附加價値 산업으로 인식돼 가고 있다는 얘기도 이젠​ 낯설지가 않다.

몇 년 전 남원에 근무할 당시, 지리산 근처 가까운 곳으로 채집을 따라나섰다가 춘란 군락지를 발견했던 적이 있었다. 너무 고무된 마음에 이 춘란들을 조심스럽게 캐어내 가져와 화분에 심어 두고 여러 해 동안 정성스레 길러 본 경험이 있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오랜 친구처럼 아주 친숙해진 식물이 되어 버렸다. 그 밖에도 한란寒蘭, 풍란風蘭, 석곡石斛 등 난의 종류도 이젠 제법 많이 익혀 두었다. 요즘은 난 전시회 같은 행사장에도 거의 빠짐없이 쫓아다니며 그 안목을 키워 오는 중이다.

지난겨울을 나면서, 집 안으로 들이질 않아 주택 베란다 야전에서 혹독한 추위를 못 견디고 죽어 버린 식물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말라죽은 빈 화분들 틈에 겨우 몇 촉 살아남아 가까스로 목숨을 버텨내는 난분을 볼 때마다, 새봄을 기다리는 성급한 마음이 앞서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춘란 무더기가 눈에 번쩍 띄었던 것이다. ​이 난을 보자마자 반가움은 물론 그걸 갖고 나온 아주머니에게 고마움 마음까지 겹쳐드는 순간이었다. 서너 촉씩 한 묶음으로 하여 마르지 않도록 뿌리 부분에는 푸른 이끼 옷을 칭칭 걸치고 있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거기 진열된 묶음 모두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즉시 잘 보관해 둔 난석을 꺼내 난분 하나하나마다 꾹꾹 눌러 가며 정성껏 나눠 심어 주었다. 그 후 한 달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늘 바삐 돌아가는 일상이지만, 이 날 만큼은 적당히 여유 좀 있었나 보다. 그동안 깜빡 잊고 있었던 난분을 떠올렸다. 잎이 무성하게 보일 정도로 2개의 난분에 꽉 들어차게 심어 두었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을 향해 바짝 다가서는 순간, 꽃대 제일 높은 곳에 아름다운 궁전 한 채 몰래 세워 놓은 걸 그제서야 발견해 냈다. 경이로움이 밀려드는 순간이다. 요란한 망치소리 하나 들키지 않으면서 꿈의 궁전을 지어 완성해 놨던 것이다. 그리고 신비에 싸인 궁전 안의 모습들을 서슴없이 열어 주었다. 연한 황록색의 꽃 이불 속의 비밀들이 보이고 있었다.

지난 3월 중순 꽃샘추위가 연례행사처럼 기승을 부리던 날, 깊이 뿌리 내린 삶의 터전을 억지로 옮겨 놓지 않았던가! 그 이후로 한 달 남짓 기간 동안 적응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거기에 고매함을 더하기 위해 힘든 산통 끝에 꽃을 피워 올렸던 것이다. 고고한 기품과 의연함으로…. 나에겐 행운이면서도 큰 희열을 맛보는 짜릿한 순간이다. 좋은 예감이 스쳐 가는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