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난타 / 허정열
새벽 6시 소사역. 한산하던 역사가 갑자기 분주해진다. 열차가 들어온다는 알림이 뜨자 구두들이 일제히 바닥을 두드린다. 출입구마다 썰물처럼 몰려드는 참여자들, 순식간에 늘어났다 줄어든다. 장단이나 높낮이 악보 없는 즉석 무대다. 슈즈, 펌프스, 원바, 슬링백, 스트랩, 부츠, 부티 웨지힐, 윙팁, 더비 다양한 주인공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순식간에 구두들의 난타가 시작된다. 무겁거나 가벼운 소리가 귀를 뚫고 지나간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적당히 느리게 달리거나 뛰는 구두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복잡함이 사라지고 힘차고 강한 상쾌함이 느껴진다. 한바탕 잘 놀고 가는 구두들의 환한 표정을 싣고 열차는 꽁무니를 감춘다.
밀물처럼 밀려온 구두가 바닥을 만날 때 난타 연주는 클라이맥스였다. 행과 열을 정할 필요 없고 무질서 속의 질서가 유지되는 모습이 신기했다. 지휘자는 열차, 무대는 소사역이라는 점이 생소할 뿐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양 몇 분 간격으로 물결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새벽 무대는 절실함이 공통분모였다. 무대의 주인공은 "누구나"라고 마음속으로 단서를 달아 보았다. "바닥과 구두의 만남은 삶에 대한 타협이며 합류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바닥에는 성공보다 더 큰 힘이 숨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침묵이 행간처럼 고였다 흩어진다. 주인공이 바뀌면서 다시 자연스럽게 북적이던 무대. 조금 느슨해지는가 싶더니 또다시 무리 지어 정점을 찍고 바닥과 한통속이 되어 춤을 추더니 쓰나미처럼 쓸려간다. 질서나 리듬에 메이지 않고 장단에 신경 쓰지 않는 난타 연주. 모처럼 눈과 귀의 호강이다.
경북교육청으로 강의 가는 날이다. 일찍부터 서둘러 나와 일행과의 약속시간이 넉넉한 덕분에 즉석 연주의 호사를 누린 셈이다. "따그닥따그닥 따닥 따다닥" 바닥에게 긴급함을 알리는 자연스런 난타 연주의 방청객 역할도 잠시다. 긴급함은 무게가 실려 무겁거나 둔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경쾌한 연주에 내 기분도 상쾌해진다. 어쩌면 내 속의 무거움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들렸는지 모른다. 나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리듬을 선물한 적이 있었던가. 어느 역사驛史에서 무대의 주인공이었을 나를 떠올려본다.
내 발을 감싸고 있는 구두를 본다. "인생! 한 줌도 안 되는 그것"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을 생각한다. 한 줌도 안 되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수많은 갈등과 고뇌, 아픔과 고통, 기쁨과 행복의 고비를 넘나들던 날들이 실려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를 말리던 시간과의 사투, 열정과 책임을 동원해 자신만의 욕망을 채우던 시간이 침묵으로 고여 있다.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수호신처럼 한 몸으로 살아온 구두, 한 사람의 하루치 시간을 장전하고 달리는 구두는 피곤해서 수없이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덜컹덜컹 세월은 빠르게 달려왔어도 나의 구두는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켜왔다. 삶의 고립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유를 버리고 일에 묶이기를 바랐던 속내를 읽고도 잘 견뎌주었다. 마음을 단순하게 먹으면 소유에서 오는 번뇌가 편안해진다는 것을 내게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인생은 생각하기에 따라 나날이 축제와 놀이터일 수 있다는 고수의 유쾌한 일침이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삶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몸부림이다. 말이 아닌 소리로 자신의 뜻을 전달한 구두는 온몸이 완벽한 타악기였다. 뚜렷한 목적을 위해서는 구두도 스스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니 그런 모습으로 내 곁을 지켰는데 스스로 외면하며 살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 것처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손안의 모래가 빠져나가듯 인생을 여유 있게 놀이처럼 순간순간 즐기라는 속 깊음이 담겨 있었다. 알 수 없는 아쉬움과 뜨거움이 스며들던 날,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장면이었다.
특별한 새벽과의 조우는 균형 잡힌 '놀 테크(잘 노는 기술)와 '일 테크'를 상기시켜 주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일 중독으로 답답한 나에게 즐거운 리듬으로 말을 걸어온 새벽 무대가 가벼운 걸음을 선사했다. 늘 놀이에 마음 기울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내게 방향을 제시한 구두의 마음을 꼼꼼하게 다시 체크해 본다. 연습 없는 즉석의 구두 난타는 희망이 멀다면 가망이라도 찾으라고 내게 보내는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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