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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처음 / 허정열

처음 / 허정열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서류가 필요하고 심사를 통한 결정이 통보된다. 새로운 것의 처음은 망망대해처럼 아득하다. 두근두근 가슴을 방망이질하는 떨림인지 설렘인지 모를 수상한 걸음이 아슴아슴 다가온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보는 일이라고 생소한 목소리의 울림이 너무 크다. 관계가 형성되자 기다렸다는 듯 팽팽한 긴장이 밀고 당기기 시작한다. 호기심이 달려오고 걱정이 밤낮없이 따라다닌다. 부풀어진 두려움이 만삭이다.

첫날, 처음 만나 마주치는 사람과 일, 알 수 없는 분위기, 모두가 낯설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샐까 봐 옷깃을 여며본다. 대책 없이 마른 침만 삼키게 된다. 무조건 부딪혀야 한다고 등을 떠미는 처음은 막무가내다. 거침이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올라가야 한다고 떠민다. 이때 간절함은 절대적이다.

새로운 도전에는 두려움과 망설임이 버티고 있다. 불안한 시선을 감추기 위해 낯선 자료에 눈인사를 건네 본다. 연필로 긁적여 보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태연한 척 윗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숨을 고른다. 시작의 생가슴은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낯섦을 품고 있는 처음은 흔들림 없는 꿋꿋함과 거리가 멀다. 익숙해질 날이 있을 거라고 확신을 가져 본다.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지만 개의치 않기로 한다. 새로운 날이 눈을 뜨면 어제라는 이름으로 바뀔 오늘이다. 여유와 느긋함을 당겨보지만 무용지물이다.

격랑을 치르고 나서 만나지는 자신감. 앙증맞은 들꽃의 향기에 눈 맞출 생각. 느긋함으로 다가올 내일. 당당하게 내 이름으로 올라갈 지면을 떠올려본다. 처음도 지지대가 필요했는지 천천히 몸과 마음이 균형을 찾기 시작한다.

시작은 낯섦에서 익숙함으로 갈아타는 환승역이다. 갈 길이 멀어 보여도 시작의 환승역부터는 가속도가 붙을 일이다. 늘 만만치 않았던 처음이다. 어차피 부딪히며 가야 할 길. 시작이 절반 아니던가. 처음을 믿어본다.

긴 삶의 이력으로 무장했는데도 처음은 언제나 낯설다. 인연이나 체면으로 나에게만 비껴가 줄 거라는 발칙한 생각은 어림없는 착각이다. 처음의 내부에는 새로운 색깔과 모양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호기심으로 도발하게 만든다.

1년 전 처음을 더듬어본다. 새로움 앞에 섰던 두려움이 굳은 채 서 있다. '꼭지'라는 생소하던 말도 딱딱하게 헤매며 뛰었던 치열함이 느껴진다. 첫걸음을 뗀 꼭지에서 어질어질한 분위기가 전해져온다. 처음을 지나고 나면 차차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한 줄기 햇살처럼 밝아 보인다.

처음의 문을 열 게 한 것은 나에게로의 도전이었다. 처음은 결핍이라는 그릇을 하나하나 채워가는 일이다. 낯섦의 안쪽과 익숙함의 바깥에는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도 나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열차를 타고 처음의 출발선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