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변명辯明 / 김상립

변명辯明 / 김상립

 

 

오래전의 일이다. 나는 급변하는 외부환경에 지혜롭게 대응하지 못한 탓으로, 힘들게 쌓아둔 회사의 이익금을 몇 개월 동안 꽤 많이 축내는 일을 겪었다. 평소 소유에 관한 한 어느 정도 담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해 왔는데, 막상 눈앞에서 매일같이 돈이 없어지니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고 무진 애를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잃어가면서 느끼게 된 막연한 공포였다. 가진 것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잠들기도 쉽지 않았고 어쩌다 잠들게 되면 악몽에 시달렸다.      

그런 어느 날, 생각에 지쳐 널브러져 있을 때 문득 이런 글귀가 떠올랐다. ‘죽음은 두렵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동안 살면서 쌓아 놓은 것 때문이다’라는 구절이었다. 아, 정말 그렇겠구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소유로부터 연유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잃어 가는 과정에서 느꼈던 막연한 공포의 실체가 손에 잡혔다. 그것은 내가 아주 힘들고 가난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부정적 상상으로부터 생각이 확장되었던 것이다.

웃기는 얘기 같지만 나는 집값이 오른다는 정보를 얻어 집을 사본 적도 없고, 훗날을 생각해 땅 한 평 투자해 놓은 것도 없다. 횡재를 기대하며 복권을 사지도 않았고, 요행을 바라는 경품 추첨 같은 짓도 외면하며 살았다. 그런데도 많지 않은 재산을 날릴 걱정 때문에 고민하고 번뇌하느라 몇 날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던 게다. 당시에 겪었던 이런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나는 사업과는 잘 맞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라는 사람은 돈을 직접 다루는 일을 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영업 대신 제품 생산공정과 기술 문제에 관심을 갖고 매달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먼지 날리는 넓은 공장을 돌고, 복잡한 기계들을 세세히 들여다보며, 일일이 원재료 표본을 채취하여 실험실을 드나들었다. 그러다 보니 애써 남의 눈치를 볼일도 없었고, 불필요한 욕심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연구에 몰두하니 매사에 따라다니던 초조함과 무리수도 대폭 줄어들었다. 또 돈 버는 데 도움 될 사람을 두고 눈치 보지 않아서 더욱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런 생활의 변화와 함께 새롭게 빠져들었던 세계는 정신문제를 공부하는 일이었다. 여태 마음과 행동이 따로 놀았던 자신을 추스르 고, 내 영혼이나마 정결하게 지켜 영성(靈性)을 올리려는 순수한 뜻에서였다. 그래서 당시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기공(氣功) 수련의 대가를 찾아 사사하기도 하고, 호흡의 달인이란 분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그 외 새로 창립한 정신과학학회를 비롯하여 몇 개의 수련단체에도 가입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틈만 나면 전국적인 강습이나 교육, 합숙훈련에도 참여하고, 뜻이 통하는 사적 모임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 보니 더러는 희한하고 놀라운 초능력을 가진 사람 들도 여럿 만나, 별별 세계를 경험하기도 하며 점차 깊숙이 빨려 들었다.   

내가 60에 들었을 때였다. 주변에서는 정신 공부에 상당한 노력과 돈, 시간을 바치면서도 현실적 삶과 좀 더 접근시키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무언가 일을 시작해 보라는 권고가 잦았다. 마침 평소 알고 지내던 서울 근교의 모모한 수련자들의 모임에 초대받아 갔었는데, 이런저런 얘기 끝에 대중들을 위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일을 놓고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내가 사이비 교주 행세라도 할 뻔한, 그런 사건이었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아마 하늘이 나를 측은하게 여겨 도와주셨던 것 같다.

그 후 내 공부가 돈이나 힘, 특히 신비주의(神秘主義)와 연결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소통하던 외부 관계를 모두 끊고, 혼자되어 그냥 자유롭게 명상과 독서를 하며 지냈다. 지금도 내 서가에는   공부했던 노트나 정신 관련 서적이 많이 남아있어서 외롭지 않다. 더 다행인 것은 그때 내 정신의 뒷받침을 위해 몸 수련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한 번씩 검(劍)에 몸과 마음을 실어 휘둘러 보기도 하고, 맨몸으로 하는 수련 동작도 잊지 않을 만큼 반복하며 육신을 지키고 있다.         

한편 공부가 조금씩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매달리게 된 게 바로 수필이었다. 내가 깨달은 내용을 재해석하여 세상으로 내보 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단이 필요했고, 어디 나서서 강의한 다고 떠벌릴 위인도 못 되는 나는, 숙고 끝에 틈틈이 써오던 수필이 바로 그런 역할을 잘 해내리라 믿었다. 그동안 내 작품에 비교적 자주 등장한 진화나 윤회, 업보와 전생, 또는 인간과 우주, 사랑과 영혼 같은 내용도 결국은 내가 고뇌했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나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까지 수필에 내세울까 봐 늘 조심한다. 특히 번역된 외국서적 등에서 따온 전문적 내용이나 종교 이론은 가능한 한 인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칠십에 들어서는 내 자유로운 사색의 범위 내에서, 별도의 자료 준비 없이 비 계획적으로 수필을 쓰고 있다. 그 결과 글의 소재가 자유분방하고, 깊이도 일정하지 않고, 독자를 설득하려는 욕심이 앞서는 글이 만들어져 곤혹하기는 하다. 그러나 쓰다가 막히면 쉽게 접을 수 있어 좋고, 또 밀쳐둔 미완의 글들도 어느 순간 아! 하고 필이 꽂히면, 재깍 완성 시키는 기쁨도 있어 힘이 솟는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수필은 아무래도 쉽고 재미난 구석은 찾아볼 수가 없고, 주로 논리적인 에세이 류의 글이 되니 나도 민망하다.    

일반적으로 이런 낯설고, 난해하며, 작가의 주장이 강한 작품은 독자들의 환영 받기가 쉽지 않다. 내가 여태 한번도 작품 공모전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도, 내 작품의 이런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글의 방향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긴 시간 노력해온 나의 정신세계를 미흡하나마 수필에 담아 발표하고, 아주 적은 수의 독자라도 내 글을 매개로 하여, 인간 근원을 사색하는 삶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진다면, 문인으로써 더 이상 바랄 게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