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지켜보기 / 곽흥렬
늦은 열한 시, 밤이 깊어가고 있다. 이층 서재에서 묵은 원고를 끄적거리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언제나처럼 거실 쪽으로 눈길이 간다. 아내는 소파에서 이미 곤한 잠에 취해 있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고르다. 전등이 켜진 채로 텔레비전은 그때까지 저 혼자서 여전히 뭐라 뭐라 떠들어댄다. 텔레비전을 끄고 전기 스위치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마음을 거둔다. 아내의 단잠을 방해할까 저어되어서이다.
아내는 참 별스런 잠버릇을 지녔다. 매일같이 불을 환히 밝혀 두고 텔레비전을 틀어 놓은 채로 거실 소파에서 초저녁잠을 즐긴다. 그렇게 한숨을 푹 자고 나서는 그때서야 비로소 침실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숙면에 들어간다.
아내의 이런 잠버릇이 나는 늘 못마땅했다. 불이 켜진 상태에서 잠을 자면 여러 가지로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어서이다. 무엇보다 국가 차원으로 봤을 때 비애국적인 행위가 아닌가. 연일 블랙아웃을 걱정하며 에너지 절약을 호소하고 있는 마당에 쓸데없이 전기를 소비하는 것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노릇일 터이다. 게다가 이 같은 현실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신체의 바이오리듬을 꺠뜨리기 때문에 건강상 아주 나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잠잘 때 쏘아지는 불빛은 우리 몸의 멜라토닌 분비를 억제해 암을 유발한다는 연구보고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아내가 잠에 빠져 있으면 가만히 다가가 스위치를 내린다. 텔레비전도 끈다. 편한 수면을 취하게 해주려는 나대로의 배려에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고양이 발걸음으로 살그머니 스위치를 내리고 텔레비전을 꺼도, 아내는 어떻게 감지하는지 쿨쿨 코까지 골면서 자다가도 금방 알아차리고 빤히 눈을 뜬다. 그러면서 전혀 생각지도 않게 버럭 화를 낸다. 자기는 그래야 오히려 잠이 잘 온대나 어쩐대나. 내 알량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유 같잖은 이유를 갖다 대는 아내의 변설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러면서 아픈 기억 하나가 뇌리를 스쳐간다.
오십여 년 전, 시골집에서 토끼를 키울 때의 일이다. 생전의 어머니는 어미가 새끼를 낳으면 보금자리가 불편할까 봐 한쪽 옆의 깔밋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어미도 어미지만 질척한 데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오글거리는 새끼들이 안쓰러우셨던 게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전혀 상상도 못한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어미가 새끼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조리 물어 죽여 버린 것이다.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결과였다. 딴에는 잘해 주려 한 어머니의 배려가 천성적으로 예민한 토끼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행위일 줄 어찌 알았을까. 과잉친절, 과잉보호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이야기일 게다. 관심이 넘치면 화를 부를 수 있음을 나는 이미 그 어린 나이에 깨달아버렸다.
'헬리콥터 맘'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헬리콥터처럼 계속 주위를 맴돌며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조종하려 드는 요즘 어머니들을 두고 일컫는 표현이다. 토끼를 향한 어머니의 행위도 헬리콥터 맘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대다수의 부모는 자신이 자식에게 걱정하고 챙겨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긴다. 아이를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길들이려 애쓴다. 하지만 자식 입장으로서는 부모의 과도한 관심이 도리어 참견과 구속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정작 아이는 스스로 날고 싶어서 안달한다.
환하게 불을 밝혀 두고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단잠에 취해 있는 아내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홀시아버지까지 딸린 집안 살림에다 직장 생활까지, 일상사에 지친 피로가 역력하다. 안쓰러운 마음에 살며시 이불을 끌어 덮어준다. 한숨 폭 자고 남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침실로 자리를 옮겨와 있을 것이다.
일쑤 잘한다고 한 일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기도 하는 걸 보면 참으로 어려운 것이 세상사인 성싶다. 자기 판단으로 행하는 관심과 배려가 타인에게는 간섭과 통제로 여겨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냥 두고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상책인가 하다.
사람 사이의 이치에 대해 골똘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가고 있다. 내일을 위해 어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오늘 밤은 생각이 복잡하여 꿈자리기가 많이 뒤숭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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