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치사함에 대하여 / 김종완
1
난 우리시대가 절대빈곤을 벗어났다는 게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다. 나 같은 놈이 옛날에 태어났더라도 똥구녁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 거다. 내게 어떤 복이 있어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겠는가. 난 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기꺼이 내 영혼을 팔았을 거다. 누군 나의 이런 태도를 보며 말할지 모른다. 사람이 그렇게 비관적이면 되냐고, 이왕 가정하는 것 멋지게 하면 안 되냐고. 그러나 난 도저히 그럴 수 없다. 당신도 한 번 배고파 실신해 보라.
난 어려서 배가 고파 실신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몇 끼 째 굶고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몸에 힘이 하나도 없으면서 잠이 쏟아졌다. 우리집은 학교에서 이삼백 미터 떨어져 있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다. 더는 걸을 수가 없어 두부집 담장 옆에 평평한 바위가 있어, 같이 가던 아이에게 “나 여기에서 좀 자다 갈래” 하고는 누웠다.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내 옆으로 모였지만 난 눈을 감았다. 이후 내가 눈을 떴을 땐 우리집 아랫목이었다. 큰누나는 울면서 나에게 설탕물을 먹이고 있었다.
정말로 배가 고프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무조건 그 기아 상태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건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가장 원초적 욕망이다. 정신의 고고함, 그런 건 최소한 배가 부른 다음의 얘기다. 나의 불행은 그 궁핍의 공포를 안다는 데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의 가난이 지겹다. 나의 영혼을 팔 기회를 잡지 못해서 ―그런 처지에 있는 자의 영혼은 누구도 돈을 주고 사려고 하지 않는다― 고고한 채 살았을 뿐이다.
만약에 나에게 이완용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 기회를 내팽개칠 수 있었을까? 이완용의 치사함을 버리고 안중근의 당당함으로 살 수 있었을까? 난 자신이 없다. 가진 자들이 부럽다. 어쩌면 그런 복을 타고 태어났는가? 단지 그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인데 마치 신으로부터 그 권리를 부여받은 척하는 가진 자들의 뻔뻔함이 역겹다. 하지만 나도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뻔뻔해지고 싶다. 난 정말 그러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다. 나의 존재감을 그들이 인정만 해 주었다면 나는 기꺼이 가진 자 앞에서 기었을 것이다. 팔 재능이 있었더라면 어떤 가격에라도 팔고 말았을 테니 나의 재능 없음이 고마울 뿐이다. 차라리 내 영혼을 팔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신께 감사드린다. 그래서 지금 신문을 보고 방송을 들으며 청렴과 결백으로 헛배가 부른 채 혀를 끌끌 차며 말하는 것이다. 더러운 세상, 더러운 놈들, 에이 도둑놈들, 다 해 먹어라. 이 치사한 놈들아.
그러고 보니 나 정도면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젠장. 그렇게 사는 것 말고는 어떤 선택의 길도 없었으니까. 주 기도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라는 대목이 있다. 난 그 고통에서 원천적으로 제외된 사람이다. 극진히 사랑 하시사 시험당할, 유혹당할 기회마저 박탈하신 신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이름 하나만은 깨끗하게 건사할 수 있었다.
2
난 내가 다른 사람 못지않게 치사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런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이 세상을 평생 이름 없는 서생으로 가난하게 살면서, 결코 채워지지 않을 부자나 권력자가 될 욕망만을 좇다가 가난한 마음으로 죽게 된다면 이 얼마나 한심한가! 젠장 마음마저 가난할 필요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서 마음이라도 부자로 살기로 했다. 돈 드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려면 우선 나에게서 치사함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 생각해 보았다. 사람이 왜 치사한가? 첫째는 내가 하찮은 욕심으로 남에게 치사한 짓을 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남에게 받은 치사한 짓의 원통함 내지 서운함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걸 되갚으려 하기 때문이다.
용서라, 용서라. 그동안 늘 외우면서도 이해 가지 않던 주 기도문의 한 대목이 섬광처럼 번쩍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다. 내가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비로소 내가 내 죄를 용서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이라고. 심판의 그날 당당히 말하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도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었거든요. 인간인 나도 용서했는데 하물며 신께서 저의 죄를 오죽 잘 용서해 주시겠어요? 내가 나의 죄인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절 용서해 주세요.”
난 큰 각성을 얻은 것처럼 흥분했다. “최후 심판의 날을 위한 투자로 나에게 죄진 자를 용서할 일이다. 나에게 죄를 진 자, 바로 그 자가 최후에 날 구원할 자이니…….” 누가 나에게 죄를 지었는가? 그리고 난 그를 용서하였는가? 난 아직까지 누굴 제대로 용서해 본 적이 없었다. 이크!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벌써 죽었더라면 심판대에 섰을 때, 신께 날 용서해 달라고 주장할 그 어떤 명분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크게 후회했을 것인가. 그래서 마음먹었다. 나는 이제부터 내가 부닥치는 모든 것을 깡그리 용서하련다. 내 기억의 연원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철저하게 용서할 것이다. 이게 최후의 심판을 위한 실속 있는 투자라는 걸 사람들은 눈치도 채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집 가족사의 연원은 기껏 조부 때로 국한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순창군 금과면 쇠시랑골(소촌리) 출신이다. 잔반 집안의 막내아들인 그는 오직 연안 김씨라는 족보의 힘으로 옥과 현령의 딸인 전주 이씨 아가씨를 아내로 얻었다. 할머니가 시집을 올 때는 몸종이 한 명 따라왔다는 말도 있으나 이후 그 몸종에 대한 말들이 일체 없는 거로 보면 믿을 만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이 전주 이씨 새색시였다. 여자이지만 모르는 문장이 없었고, 청산유수의 말솜씨를 지녔다. 그녀는 책 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랑을 꼬드겨서 담양 읍내로 나왔다. 담양은 순창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평야가 넓어 큰 부자들이 많았고, 죽세공품이 발달해서 농토가 없는 사람들도 소쿠리를 짜거나 참빗을 만들면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탈출한 새댁은 얼마 안 있어 담양의 큰 지주 집 안방의 진객으로 변해 있었다. 마님의 가정교사 격으로 마님이 심심치 않게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고, 자문에 응하고, 문장을 가르치고, 편지도 써 주고…. 그러면서도 굽실거리지 않고 당당했다고 했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소작을 얻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부잣집 안방에서 놀다가 저녁이면 초라한 자기 초가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남편이 참으로 무능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할머니의 두 번째 아들은 할아버지의 씨가 아니다. 연안 김씨는 특유의 생김과 성격이 있다. 그런데 작은아버진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할머니가 입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할아버지도 아무런 티 없이 둘째를 대했지만 그 아들은 개차반으로 자랐다. 그는 커서 술이 잔뜩 취하자 댓일을 하는 누구를 찾아가서 아버지, 라고 했었단다. 너무나 빼어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할머니의 부정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용서하련다. 눈을 감았다. 명색이 문학을 하는 놈이다. 문학이란 선악을 구별 짓는 게 아니다. 문학의 세계란 그 어떤 악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정당히 밝힐 수 있는 곳이다.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이 되는 전복의 장이 문학이다. 사실 따져보면 내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할머니를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건 할아버지의 몫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완전히 용서했을까? 그랬던 것 같다.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의 등쌀에 눌려 사셨다는 걸 보면. 할머니는 한 번 용서받고는 그런 일이란 없었던 것처럼 떳떳하게 큰 소릴 떵떵 치고 사신 것이다. 당사자들이 다 계산 끝낸 걸 내 어찌 용서하지 못하리오. 난 용서를 끝내고 눈을 뜨려고 했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할아버지는 결코 할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어. 그녀는 남편께 자기의 잘못을 빌질 않은 거야. 자기의 부정을 토설했더라면 할머닌 평생 할아버질 그토록 구박하며 살 수 없었을 거야.’
난 할아버지가 너무나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제대로 아내의 부정을 따져볼 기회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갓난애를 보고 자길 닮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 수도 없는 거고, 아이가 다 자라 자기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걸 날마다 확인하면서도 간통의 결정적 증거도 없이 마누랄 때려잡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배신의 분노를 어떻게 삭였을까? 도량이 넓은 척, 따져 밝혀 놓으면 당신 처지가 너무 비참하니까, ‘내 차라리 널 용서하고 말리라’고 결심했겠지. ‘다 안다.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라’ 남편이 비장하게 말하자 아내는 반성한 척 고개를 숙였으리라. 그러나 세월은 모든 것을 흐려놓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내는 시치미 뚝 떼고 자기의 부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남편의 무능을 악착같이 부각시키며 함부로 대했을 것이다. 십중팔구 그랬으리라. 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지금의 내 물러터진 성격이 바로 할아버지의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할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반성하지 않는 자를 어떻게 용서한다는 말인가!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결코 나의 아내를 용서할 수 없어.”
이게 누구의 목소리인가. 나의 목소리인가, 할아버지의 목소리인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과연 인간이 누굴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을까? 난 문학을 한 덕분에 어떤 상황도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어떤 처지의 당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해 왔고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런데 과연 이해가 용서일까? 아니다. 그건 용서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일 뿐이다. 용서란 징계다. 죄만큼, 잘못만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용서란 있을 수 없다. 징계할 수 없다면 네 가슴이 갈가리 찢겨지도록 네 눈앞에서 날 희생시키는 것이다. 네가 지불해야 할 징계를 내가 대신 맡는 것이다. 그리하여 네 마음이 찢기고 찢겨서 다 해져 사라질 때까지 내가 대신 희생되는 것이다. 너를 더 아프게 하기 위해서 너 대신 날 징계하는 것이다.
난 다시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나의 눈앞엔 이미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없었다. 다만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난 계속해서 앉아 있었다. 갑자기 소리, 소리들이 소나기 되어 몰아치다가 곧 사그라지고 다시 몰아치고 또 사그라지고, 그러길 반복했다. 들리지 않던 작은 소리들까지 귓속으로 들어와 속삭이더니 점점 모든 소리가 멀어져 갔다.
아내가 잔뜩 화가 나서 날 쳐다본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당신이 날 배반했어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자 우리 집 아이들 셋이 나타나더니 쓸쓸한 표정으로 제 부모를 쳐다보다가 사라진다. 아내도 사라진다. 이쪽저쪽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웅성거리며 날 에워싸기 시작한다. 나는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험한 눈으로 노려본다. 나의 분노가 불씨가 되었나, 갑자기 나의 몸에서 연기가 나더니 금세 화염에 휩싸여 버린다. 난 화염 속에서 계속해서 외친다.
“주여, 내가 나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내가 누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난 다급하게 다시 외친다.
“주여, 내 죄를 용서치 마시옵고 용서치 마옵시고, 내 육신을 다 태우사, 재 하나 남지 않도록 다 태우사, 내 죄가 그리고 내가 용서하지 못한 그들의 죄가 다 사하여 질 때까지 내 육신을 다 태우사…….”
나는 육신이 산화되고 내 기억조차 깡그리 불태워지길 열망한다. 뜨거운 불길이 몸을 태우며 구멍구멍으로 파고들어 숨이 막혀 헉헉거리며 몸부림치다, 눈을 떴다. 꿈이었다. 온몸은 흥건히 땀에 젖어 있었다. 꿈이라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꿈이 아니다.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가슴에서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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