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덮고 모래밭에 누워 / 이향아
퇴직을 하면 실컷 여행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 시간에 배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국의 황하 유역,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 이름을 줄줄이 외우면서 찾아갈 날을 기다렸다. 그래도 실크로드를 여행한 것은 생각할수록 잘한 일이다.
돈황의 막고굴莫古窟을 향해서 버스가 일직선으로 뻗은 길을 3시간이나 달릴 때 시야에는 온통 사막밖에 없었다. 나는 지평선, 지평선이라고 소리 내어 읊었다.
막고굴에 도착하여 떠나온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전화를 했다. 간밤 꿈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집은 모두들 무사하다고 했다.
그날 오후 다섯 시 명사산에서 낙타를 타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그러나 명사산월아천鳴砂山月牙泉이란 현판이 걸린 정문 앞에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걸 보고 나는 문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그중에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은 듯했다. 마치 돈황의 명사산이 한국의 산인 것 같았다. 이것도 국력이라면 국력이겠지, 우리는 서로 "안녕하세요?"고개를 끄덕거렸다.
낙타는 훈련이 잘되어 있었지만 오물이 엉겨 붙어 지저분했다. 무섭게 뜨거운 햇살을 가리느라 입구에서 구입한 마스크를 쓰고 홑이불 같은 스카프도 두르고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걸치니 눈만 겨우 내놓은 꼴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밀치는 속에서 40분씩 타기로 한 낙타를 한 마리씩 골라잡았다. 우리를 태운 낙타들은 한 줄로 서서 모래산 등성이를 천천히 올라갔다. 낙타가 흔들릴 때마다 온몸이 흔들렸다.
등성이 중간지점에서 100미터쯤 되는 모래산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간 다음 거기서 대나무 판자를 타고 경사진 길을 미끄럼 타듯이 내려오는 코스가 있었다.
그러나 대나무 판자를 타고 미끄럼을 타는 건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몇몇은 그냥 맨몸으로 경사진 길을 뒹굴 듯 내려왔다. 뒹굴면서 나는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인지, 세상에 없는 이상한 노래였다. 사실은 노래를 부르려고 한 게 아니라 소리를 맘껏 지르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사막으로 갔다.
지금까지의 과정은 모두 연습이고, 진짜의 공연은 오늘 저녁인 것처럼 긴장이 고조되었다. 우리는 사막으로 가기 전에 오아시스부터 들러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메뉴는 기대하던 닭죽, 그것은 마치 공연의 성공을 기원하는 만찬 같았다.
유 교수, 이 교수 그리고 수연 씨와 나는 한 조가 되어 죽에 넣을 마늘을 아주 과학적으로 깠다. 학생들이 두 통을 까는 동안에 아마 열 통쯤 깠을 것이다. 수십 년 쌓아 올린 노하우라고 애들처럼 깔깔대면서.
저녁을 잘 먹고 손을 씻으러 개울로 갔다. 말이 개울이지 경사진 축대 아래 조금씩 흐르는 물인데, 쪼그리고 앉아 움키다가 한쪽 발이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면서 반사적으로 오른 손바닥을 땅에 짚었는데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피가 흘러내렸다. 검지가 한 마디쯤 찢어져 있었다. 손가방 속에 비치해 두었던 일회용 밴드에 테라아미신 연고를 발라서 붙였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자꾸 아프냐고 물었다.
정말로 아팠다. 도저히 '괜찮아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손바닥도 손바닥이지만 오른발 발목뼈 부근이 벗겨져 있고 엉덩뼈도 뻐근하였다. 꿈자리가 어지럽더니 기어코 이런 일이 생겼나? '하마터면 부러질 뻔했는데, 이만한 게 다행이다.'생각하며 억지로 웃었다.
이번 여행의 절정은 바로 오늘이다. 짐을 챙겨들고 천천히 걸었다. 넘어졌다는 소문이 날까 봐 짐을 들어주겠다는 걸 사양하면서 사막의 억센 가시선인장을 헤치고 꽤 지루한 언덕 하나를 넘어갔다.
아, 이게 무엇인가. 영화에서나 보던 구릉, 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린 진짜 사막이 전체 스크린을 차지하듯 펼쳐 있었다. 우리는 오늘 밤 거기서 잘 것이다. 마치 신방으로 향하는 신부처럼 두근거렸다. 아까 다친 손가락과 발목뼈가 좀 아파도 괜찮았다.
각자의 침낭을 모래밭에 깔았다. 그리고 흥분을 누르기 위해서였을까? 우리는 돌아가면서 지나온 이야기들을 했다.
해가 꼴깍 지니까 서늘한 바람이 파고들었다. 준비해 온 웃옷을 껴입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하루 종일 볕에 달구어진 모래가 온돌방처럼 따끈따끈하였다. 누웠지만 자려고 누운 것이 아니었다. 별들과 곧바로 눈을 맞추기 위해서 누웠을 뿐이다. 아는 노래란 노래는 모두 불렀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실크로드가 아니라 사막에서의 하룻밤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유성은 물 흐르듯 천천히 혹은 아주 빠른 화살같이 떨어졌다.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넓은 은하수가 맑은 별로 가득 넘쳤다.
나는 왜 세상에 바뀌어 은하수조차 변했다고만 생각했을까? 옛날과 다름없는 별밭을 보면서 자꾸만 울고 싶었다. 나는 지금 사막에 누워 있구나 은하수를 이불처럼 덮고 있구나.
밤을 새워 별빛을 지키자고 했는데 노래를 부르다가 하나 둘 잠이 들었나 보다. 새벽 두 시 반이 된 것까지는 똑똑히 알겠는데 그 뒤로는 모르겠다. 갈수록 바람이 세어져서 얼굴까지 침낭 속에 묻고 등까지 따뜻하니까 종일 쌓인 피로가 눈꺼풀을 무겁게 눌렀을 것이다. 그렇지만 억울하다. 잠이 들다니!
침낭을 가져오지 않은 회원이 세 명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밤이 너무나 길더라고, 혀가 바짝바짝 마르면서 추웠다고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끼리 노래를 부르면서 온갖 멋을 부렸던 지난밤이 미안했다.
절정은 지나갔다. 쓸쓸함과 허무함을 남기고. 이제는 하강선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가? 다시 어느 고비를 바라보고 걸어가야 하는가? 비로소 집에 돌아갈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돈과 행복은 얼마나 친할까 / 서숙 (0) | 2024.11.26 |
---|---|
[좋은수필]어탁 / 제은숙 (2) | 2024.11.25 |
[좋은수필]감실부처 제행무상을 역설하다 / 신홍락 (1) | 2024.11.23 |
[좋은수필]몇 초의 포옹 / 조남숙 (4) | 2024.11.22 |
[좋은수필]그늘에 들다 / 배귀선 (3) | 2024.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