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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老木을 우러러보며 / 한흑구

老木을 우러러보며 / 한흑구

 

 

나는 오늘 보경사寶鏡寺 앞뜰에 앉아서 하늘 높이 솟아오른 느티나무 노목 하나를 쳐다본다.

오백 년이나 넘어 살았다는 이 노목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모르는 듯이 상하좌우로 확 퍼져 올라섰다.

그러나, 지금 이 노목은 검푸른 그늘을 새파란 잔디 위에 드리우고 있지만, 그 다섯 세기의 길고 오랜 세월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넓은 허공에 조그마한 한 점의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스럽기도 하다. ​

한때, 큰 번개에 맞아서 찢어졌다는 큰 가지 하나가 떨어져 나간 부분에는 크고 기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 늙은 나무속에는 얼마나 많은 구멍들이 아래위로 뚫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겉으로 보기에도 큰 구렁이들이 얼마든지 드나들기에 충분하다.

구렁이들이 살지 않는다면, 달밤마다 꿀밤을 주워 먹는 다람쥐들이 몇 가족이라도 숨어서 살 수 있을 만하다.

달 밝은, 고요한 가을밤에 한 가락 실바람이 불어오면, 저 노목은 콧구멍도 이 구멍도 아닌 저 큰 구멍으로 한 가락 신비로운 소리로 슬픈 노래라도 부를 것 같다.

'나무는 늙어도 재목으로 쓰이지만, 사람은 늙어지면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이러한 말을 나는 들었다. 그러나 베이컨(Bacon)은 늙은 것, 오래된 것을 좋다고 주장하였다.

​Old wood best to burn, old wine to drink, old friends to trust, and old authors to read.(고목은 불을 때기에 좋고, 오래 묵은 술은 마시기에 좋고, 오랜 친구는 믿을 수 있고, 노련한 작가는 읽을 만하다.)

이 말의 참뜻은, 시간의 흐름에서 오래도록 늙고 낡아진 것을 뜻함이 아니고, 그 오랜 시간을 시련과 곤고困苦에서 이겨나서 숙달되고, 노련해진 것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나는 묵묵히 앉아서 이 구멍이 뚫어지고, 가지들이 땅으로 쳐져서 한편으로 쓰러질 듯이 기우뚱한 큰 노목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본다.​

구부러진 가는 가지마다가 얼마나 많은 비바람에 휘갈김을 견디어냈으며 얼마나 많은 찬 서리에 굵은 가지들이 울룩불룩한 가죽과 같은 껍데기로서 씌워졌을까.

어린 나무에게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이 거칠고, 꽉꽉한 껍데기들은 이 늙은 나무의 괴로움과 슬픔의 정情이 솟구쳐 나와서 말라붙은 흔적이나 허물이 아닌지.

이러한 상념에 잠겨서, 나는 이 늙은 나무의 모양을 우러러보면서, 나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만 더듬어 보기도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나무를 좋아했다.

오월이면 꿀 냄새가 풍기는 아카시아꽃들을 따서 먹기를 좋아했다.

유월이면 꽃이 피는 밤나무 그늘 아래서 안서岸曙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와 주요한의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몇 번이고 줄줄 외기도 했다.

버드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의 이름 석 자를 칼로 새겨놓고, 그것이 해마다 나무와 함께 커가는 것을 보면서 기특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도 고향에 돌아가면 그 버드나무가 살아있을까, 육십이 넘은 오늘까지도 가끔 생각해 본다. 나무는 오랫동안 산다. 우리나라에도 천 년이 넘은 노목거수老木巨樹가 있지만, 미국의 서북부에는 오천 년이 넘는 노목이 많다는 것이 나무의 나이테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나무는 한곳에 가만히 서서도 오랜 세월을 살지만, 사람은 이곳저곳 떠다니면서 별별것을 다 찾아 먹으면서도 백 년을 살기가 힘이 든다.

사람도 육 심이 넘으면, 노목의 껍데기마냥 피부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손잔등은 거칠어지고, 검은 티들이 덮이고, 얼굴엔 검은 주근깨들과 검버섯들이 돋고, 어깨와 잔등에도 많은 주근깨와 반점이 덮인다. ​

그뿐인가. 폐를 앓았던 나의 허파에는 구멍이 뚫어졌던 곳도 있을 것이고, 지독한 파스와 아이나의 복용으로 위장은 헐고 나른해졌을 것이다.

저 노목은 그의 구멍 속으로 다람쥐들이 드나들어도 끄떡없고, 소슬바람에는​ 신비스러운 음악 소리를 내고, 해가 쪼이는 뙤약볕에서는 서늘한 그늘을 덮어줄 수도 있지만 사람은 늙어서도 왜 그러한 신비력을 가질 수 있게 태어나지 못하였을까.

이제, 나의 몸속에서 이름도 모를, 눈에도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나의 오장육부를 쑤시어 먹는 날에는, 나는 저 노목과 같이, 푸른 잎도, 가지도, 꽃도, 열매도 맺어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다시 한번 저 노목을 우러러본다.

시간의 흐름을 탓하고, 운명의 슬픔을 아프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는 저 노목이 아무 말도 없이 높이 서 있으면서, 다만, 그날만을 잔디 위에 덮어주는 하나의 사명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죽고 저 노목도 언젠가는 다 죽어야 한다. 그러나 저 노목은 다 썩어서 구멍이 뚫리고, 다람쥐가 드나들어도, 그냥 속임수 하나도 없이 서늘한 그늘만 드리우는 사명 하나만을 갖고서도 저렇게 오래 살 수가 있다.

그러한 저 노목이 나는 자꾸만 쳐다보이고 우러러보인다.

나는 일종의 외경심畏敬心마저 느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