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갈색에 살다 / 구유화
흰색 찻잔에 담긴 커피는 색깔만으로도 나를 사로잡는다. 조금 떨어져 있어도 그 향기로 나를 잡아끈다. 베란다 창 너머로 오후의 햇살이 아른거리면 누군가 부르는 듯이 색깔보다 진한 향기를 들고 창가에 선다. 나의 독백을 향기에 싣고 때로는 일렁이는 눈물을 암갈색에 담근다.
정오를 넘어선 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나면 어김없이 밤을 밝히고 만다. 그런 날은 일부러 늦은 시각까지 무엇을 하다 잠을 청해도 정신은 더욱 명료해진다. 유리창에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보면서 초침 소리가 크게 들린다고 느낄 즈음 째깍거리는 소리는 내 머리를 두드리다 나중에는 가슴까지 때린다. 창밖의 나무가 바람과 어울려 모자 쓰고 지팡이를 짚은 마귀할멈도 만들어냈다가는 금세 국자 모양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럴 때면 유리창이라는 무대에서 벌이는 그림자놀이를 보는 혼자만의 관객이 된다. 뒤척이며 밤을 보내다 창밖에 어둠이 밀려갈 시간에야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아침형 인간이라면 일어날 시간이 다 되어가는 순간 나는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두어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는 등교하는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위해 등이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지만 일어난다. 맛과 향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번번이 저지르는 나의 생활상이다.
그런데 이 마법도 통하지 않는 철옹성이 있다. 지난 몇 해 전에 국문학과에 편입했다. 공부만 해도 되는 나이가 아니기에 평소에 해놓지 못한 과목이 있게 마련이어서 매 학기 시험 때가 닥치면 밤을 새워야 할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 날은 일부러 저녁 아홉 시쯤 잠을 쫓기 위하여 커피를 마셔둔다. 마법을 믿고 그 힘에 기대어 못다 한 과목을 채우기 위해서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정작 필요한 순간에 내 나름의 비법은 통하지 않는다. 내가 필요해서 마실 때는 잠들게 하고 젖어드는 기분에 운치를 찾기 위해 마셔놓으면 밤에는 잠을 재워야 하는데 오히려 신경이 올올마다 살아있게 만든다. 그 유혹을 견뎌내야 하는데 나는 알면서도 늘 당하고 만다. 숱한 밤을 밝힌 청춘의 시간을 색으로 나타내면 암갈색이지 싶다. 물리적 나이와 관계없이 새파란 의식과 날 선 시선을 잃지 않고 있다면 청춘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될 테다. 이십 대라도 세상 다 산 노인처럼 열정이 없고 처세술과 이해관계에 밝다면 그런 사람을 청춘이라고 할 수는 없다. 환갑을 넘고 있는 어느 소설가를 대면한 적이 있다. 겉모습도 젊어 보였지만 그의 눈은 이십 대 청춘의 푸른 의식과 시선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작가가 살아가고 있는 여러 날을 그의 눈이 대변하고 있었다. 암갈색으로 채색되는 삶을 살고 있노라고 말이다. 그는 아직 청춘이었다.
젊은이라도 고뇌의 밤을 보내지 않는다면 청춘일 수 없고 물리적으로 젊음을 넘어선 나이라도 삶과 사랑과 예술로 무수한 밤을 밝힌다면 그는 청춘이지 않을까. 암갈색은 그런 청춘의 색깔이다. 청년기는 흑과 백으로 양분되던 십 대와 달리 혼란에 맞닥뜨리게 된다. 성인이 되기 위한 전초전을 치러야 하는 즈음에 우리는 이 암갈색 향기에 빠져든다. 초등학교 때 되고 싶은 사람이 뭐냐고 묻는 란에 서슴없이 적었던 꿈이 그야말로 꿈으로 끝나야 한다는 현실을 알아채면서부터인지 모른다. 졸업과 동시에 직장을 얻어야 하는 현실에 부닥치면서 세파라는 파도에 부서지는 꿈을 꾸며 한 잔의 커피를 들고 인생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생의 고뇌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음미에서 로댕은 조각을 했을 테고 고갱은 타히티 섬의 원주민을 그렸고 고흐는 '해바라기'를, 이사도라 던컨은 토슈즈를 내던지고 맨발로 춤을 추었을 것이다.
몇 해 전 시월에 수도원을 찾은 적이 있다. 거기서 보았던 햇살 속에 나부끼는 암갈색 옷자락은 잠시 동안 숨을 멈추게 했다. 백발의 노 수사대 청년기의 수사도 입고 있는 구도자의 옷, 짙은 갈색 수사복이었다. 세상의 어느 것도 끌어안아 삭이고 난 후의 색깔이 저러하지 않을까. 긴 사색의 끝마저 하얗게 태우고 삭여진 빛깔이지 싶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예수의 등에 지워진 나무 십자가의 색이 아닌가. 인류 구원의 색이며 동시에 인간이 빚진 색상이다. 성서를 보면 예수께 빚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우리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 말이 귀를 뚫고 들어오기에는 우리의 귀는 티브이와 컴퓨터 등 각종 매스컴이 쏟아내는 소리들로 꽉 차 있어 채워질 여백이 없다. 신이 준 감각으로 느껴져야 우리의 삶은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밤 열 시를 넘어서면 어느 거리고 눈을 때리는 색깔의 불빛들이 밤거리를 넘실댄다. 외면할 수 없도록 쏘아대는 광고판이 정염을 토한다. 걸려 넘어지는 청춘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잡히지 않는 내일에 목말라하면서도 미래를 놓지 않는 젊음도 있을 것이다. 샤르트르의 평생 연인이었던 시몬느 드 보봐르는 실존주의 문학의 백미인 그의 소설 <초대받은 여인>에서 '우리는 영원을 꿈꾸지만 확실한 것은 순간뿐이다'라는 말로 인간의 찰나적인 속성을 간파해냈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 소울 메이트, 생의 도반, 영원할 수도 있다고. 이 시대의 꿈을 꿀 수 있다고. 하지만 감각은 손만 뻗으면 잡히는 거리에 있고 영혼의 길은 밤하늘의 별처럼 멀어, 고독하기만 하다.
하얗게 지새는 시간, 밤새 뒤척인 고통을 태워낸 빛깔. 신라 42대 흥덕왕은 왕비인 장화부인과 사별한 뒤, 왕비를 잊지 못해 세상을 뜨기까지 책과 씨름하며 감내했다고 한다. 시중마저 환관들이 들게 하고 오직 정사에만 전념하며 왕비를 그리워했다. 꽃 같은 궁녀들도 멀리하고 철저하게 자신에게 엄격했던 왕의 사랑은 순장시켜 삭여진 사랑이지 싶다. 왕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면 암갈색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유형의 육체를 안아 볼 수는 없어도 가슴속에 살아있는 여인. 영원을 향해 승화시킨 사모는 바로 기도이리라.
암갈색은 청춘을 삭인 혼의 색상이다. 날뛰는 객기를 다스리고 타는 열정을 잠재운 색깔이며 때로는 끓어오르는 분노도 가라앉힌 흔적이다. 막막하여 잡을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소주잔을 기울이고 늦은 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인적 끊긴 도로를 활보해 보는 젊음, 세상을 향해 어깃장을 놓던 용기에 청춘의 색깔은 담긴다.
암갈색 향기가 온몸에 스민다. 창밖의 햇살이 나뭇가지에 반만 얹혀있다. 치열하게 살아온 자만이 채색할 수 있는 색, 인류가 빚진 나무 십자가는 이천 년을 건너와 우리 집 거실 벽에 걸려있다. 예수는 오늘도 말한다.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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