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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거처(居處) / 김은주

거처(居處) / 김은주

 

 

*님이 거처를 옮겼다는 전갈이 있어 밤길을 나섰다.

모진 추위를 견딘 매화가 제 몸을 연 봄날, 분분한 그 꽃잎, 미처 보지도 못한 채 님은 기별 없이 먼 길을 떠났다. 오대산 쯔데기골 산중 거처에 아직 잔설이 채 녹지도 않았을 터인데, 등을 받쳐주던 대나무 평상과 지팡이마저도 버리고 어디로 가신 것인지, 도대체 간 곳을 모르니 마지막 길목이라도 지키고 싶어 나선 길이다. 보고 싶어, 너무나 보고 싶어 나선 길인데 생전의 그 모습이 그저 아련하기만 하다. 갈수록 어둠은 깊고 길은 멀다. 한밤의 기침마저도 귀한 손님 맞듯 맞으신 님, 쿡쿡 새벽 정적을 열었을 님의 기침 소리가 내 가슴을 부리로 쫓는다. 눈이 녹고 산골 오두막에 봄이 오듯이 님도 다시 돌아오면 좋으련만 허공에 발 뻗은 풍란같이 그 바람은 무망하기 짝이 없다. 가 닿을 수 없는 곳, 닿을 수 없으니 이를 수도 없는 길, 님은 그렇게 이승을 떠나고 있다.

절, 턱밑에 와 차가 밀린다. ​차를 버린 사람들이 님을 향해 한 걸음씩 발을 옮긴다. 괭이밥이 핀 묵정밭을 지르고 붓도랑을 건너 길이 아닌 길을 따라 사람들은 구름처럼 절로 향한다. 거대한 물결이다. 출렁이지도 않고 흐르는 도도한 강물이다. 걷는 내내 등허리에 봄볕이 따사롭다. 밀리듯 쓸려 경내에 도착하니 님은 이미 평상에 누워 다비장으로 향하고 있다. 세치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님을 바라본다. 얇은 장삼 아래 누운 몸이 그대로 드러난다.

금방이라도 떨리며 숨결이 터져 오를 듯 위태롭다. 머리서부터 내려오던 내 눈길이 단전쯤서 멈춰 섰다. 장삼이 봉긋이 산을 이룬 곳을 가만 들여다보니 모아진 님의 손이다. 더는 볼 수 없어 그곳에서 눈길을 거둔다​. 거둔 눈길은 이내 땅으로 떨어지고 마른 황토에 후두두 눈물이 떨어진다. 가고 오는 일이 어디 사람만의 일일까마는 그저 사람이어서, 오가며 지어 놓은 시절인연이 많아 가슴을 친다. 계절은 가면 다시 오게 마련이고 진 꽃은 다시 피어나지만 한 번 간 인연은 통 다시 온다는 기약이 없다.

절로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온다. 편백나무 숲으로 법구가 든다. 숨이 턱에 찬다. 저마다 앞사람 발치만 내려다보며 숲을 오른다. 어떤 이는 염불을 하고 어떤 이는 합장을 한다. 그 흔한 만장도 꽃상여도 하나 없다. 꼿꼿이 선 편백 숲만 무성할 뿐, 그 사이로 수많은 사람이 죄다 스며들었다. 숲과 숲 사이에 사람이 있고 다시 숲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숲이 되는 순간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편백 가지가 하늘을 찌를듯하다. 그 무엇도 지니지 아니한 채 그저 단출함 하나로 꼿꼿이 삶을 건너오신 님이 거기 계신다.

참나무 장작더미에 님을 뉘이고 다시 그 위에 장작을 쌓는다. 겹겹이 염을 하지 않은 탓에 장작의 무게를 고스란히 안는다. 얼마나 갑갑하실까. 나는 잠시 내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큰스님의 거화가 시작되고 "스님 불들어 갑니데이" 상좌스님의 목소리가 봄 하늘에 메아리가 된다. 수만의 사람이 동시에 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제 몸에 불이 든 듯 누구는 울고, 누구는 염주를 돌리고, 누구는 땅을 친다. 숲에 앉은 새들도 놀라 일순 날아오르고 봄볕을 가리는 연기가 하늘에 가득하다. 육신 하나 가뭇없이 사라지는데 한나절이면 족하다. 이 짧은 소멸의 과정을 낱낱이 들여다보며 무엇을 잡고 무엇에 연연해 할 것인가?​ 이 순간, 그저 놓고 가는 일밖에 더 할 일이 없다. 편백 숲 사이로 님은 한줌 연기가 되어 가뭇없이 사라지고 맹렬한 화기는 재를 눈가루처럼 뿌린다. 머리 위에 흰 재를 가득 얹고 바람 없는 봄볕을 맞으며 다비장을 내려왔다.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오는 길, 광양쯤서 매화꽃을 피운 고목 하나가 머리채를 뽑혀 어딘가로 팔려간다. 잎 다 진 가을도 아니고 지금 한창 꽃피워야 할 시기에 무슨 잘못이 있어 저리 끌려가는지 트럭 뒷자리에 누운 매화나무가 안쓰럽다. 사람 욕심에 끄달려 가는 매화는 거의 기진한 모습이다. 가지 끝에 매달린 꽃들이 나를 향해 아우성을 친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한껏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 소리를 듣는다. 트럭 꽁무니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흔들리는 가지를 바라보다 혼자 중얼거린다. "그냥 두지" 어린 나무도 아니고, 저 나이 되도록 제 발치의 흙밥을 먹고 살았으면 그냥 그 자리에 두지. 저 노구를 이끌고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러나 사는 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여기에서 저기로 거처를 옮기는 일이 마음과 달리 저리 될 수도 있는 것을.

눈앞에 가지가 안개처럼 뿌옇게 변했다 다시 선명해진다. 그렇지, 사는 일이 견디다 비워내다 그러다 홀연히 뽑혀 어딘가로 떠나는 일이지. 아직 꽃 피울 날이 무수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다시 이승으로 다만 거처를 옮겨 갈 뿐이지. 제 뿌리에 달린 흙밥이 새 흙을 슬퍼하며 섞여지지 않더라도 그렇게 떠나는 것일 테지, 잡지도 말리지도 못할 이 일.​

님은 속가의 우리들이랑 입장을 달리하셨고 매화는 뿌리 내렸던 남도 땅을 떠났을 뿐이다. 다만 거처를 달리한 그들을 두고 몽매한 중생들 마음만 분주할 뿐이다. 님도, 매화도, 새 거처에서 새움을 틔우고 새 밥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며 거처를 달리한 그들을 남도 땅에 남겨두고 나는 총총 이승으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