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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심각한 이야기 / 송혜영

심각한 이야기 / 송혜영

 

 

지렁이는 나에게 해코지는커녕 눈 한 번 흘긴 적도 없다. 그런데도 비 오는 날이면 지렁이가 무서워 학교에 가기 싫었다. 학교 가는 길목 곳곳에는 붉은 흙을 헤치고 비를 맞으러 나온 지렁이들이 불량스럽게 꿈틀거렸다.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펄쩍 뛰고, 비명을 질렀다. 어렵사리 학교에 갔다 오면 메두사와 격전을 치르고 겨우 살아난 것처럼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다 커서도 지렁이는 좀 안 봤으면 싶었다.

이제 도시에는 산성비를 맞으러 포도를 뚫고 나오는 지렁이는 없다. 그들은 다 일찌감치 보따리를 싸 제 살만한 땅을 찾아갔다. 그 사라진 원시의 지렁이를 여기서는 자주 본다. 뿌리가 깊은 풀을 뽑거나 뭐 하나 심으려고 땅거죽을​ 건드리면 어김없이 영양 상태가 좋은 우둥퉁한 지렁이와 만난다. 처음에는 호미 자루를 던지고 십 리는 달아났다. 자주 보니 예전의 징그럽다거나 저어하는 느낌이 많이 누그러졌다. 무서워 보이는 사람도 자주 대하면 제법 만만해지지 않는가.

이제 흙 속이 편한 그 꿈틀거리는 삶을 한 방식으로 이해하게 됐다. 내 어쭙잖은 노동이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아 호미질이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간혹 재수 없는 지렁이가 내 어설픈 낫질에 땅속에서 끌려 나와 몸통이 동강나는 일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진심으로 지렁이의 절단된 몸에 통석의 염을 금하지 못한다.

어찌 된 게 이곳에서는 움직이기만 하면 뭔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게 된다. 나의 하루 일과는 상해와 살생의 연속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먹기 위해 심은 풀의 빠른 성장을 위해 안 먹는 건 뽑아 죽인다. 부지런을 떨며 돌아다닐수록 내 육중한 발밑에 깔린 벌레들이 줄줄이 실려​ 나가고, 힘없는 어린 풀들이 짓밟혀 갱신을 못 하게 된다. 가끔 급수가 높은 살생을 교사敎唆하기도 한다. 처마 밑에서 일가를 이룬 말벌의 무리를 독가스로 몰살 시키거나 길을 잘못 든 뱀을 처치하도록 지시한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너를 죽이는, 긴급피난緊急避難에 해당하는 사안이라고 합리화해보지만 뒤끝이 영 개운치 않다.

모기의 빈번한 흡혈을 참지 못하고 그들의 은신처인 담쟁이넝쿨을 따라 다량의 농약을 살포한 적도 있다. 그 결과 흡혈에 가담하지 않은 민달팽이, 고추잠자리, 박각시나방 같은 녀석들이 약물에 중독되어 신경계 이상을 일으키거나, 아예 세상을 떠나는 참극이 벌어졌다.

미필적고의未畢的故意에 해당하는 살생도 한다. 커피를 끝까지 다 마시지 않는 습관이 여기서는 살생을 유도하는 행위가 된다. 내가 마당에서 먹다 남긴, 설탕기가 있는 커피에 빠져 죽은 벌이나 잠자리, 하루살이의 명복을 빈다.

어쩌다 왕국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밑동이 땅의 일부가 된 나무의자를 쓰러뜨리자 그곳은 거대한 왕국이었다. 거미줄 같은 도로망에는 개미들의 발길이 분주했고 층층이 들어앉은 집에는 그들의​ 금쪽같은 새끼들이 바글바글했다. 아차, 싶어 곧 수습에 들어가려 했지만 늦었다. 나무를 제자리에 바로 놓기도 불가능할뿐더러 옆으로 쓰러진 왕국은 무너진 것과 진배없다. 방부액을 듬뿍 바른 잘생긴 낙엽송을 새로 박으려던 계획을 미루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들에게 이사 갈 말미, 새로운 터를 물색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사나흘 지나 들여다보니 '황성 옛터'에는 '인걸'은 간 데 없고 스산한 바람만 가득했다. 그들이 남부여대해 급히 떠났을 고단한 여정과 이어질 기 노력은 다 내가 노량으로 한 일 때문이다.

콘크리트 속에 살며 아스팔트를 밟고 다닐 때는 이런저런 죄의식은 없었다. 너무 예민한 거 아냐.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지. 입을 삐죽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가까이 지낸다는 게 바로 자연을 죽이는 일이라는 뻔한 깨달음에 새삼 기운이 빠진다.

진정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자연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냥 그들끼리 살게 내버려 주어야 한다. 이미 만들어진 문명의 안락함에 만족하며 도시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말 일이다. 지렁이의 잠을 깨우거나 허리를 끊지 말며, 개미의 성을 위협하지 말고, 개미의 역사를 훼방 놓지 말며, 물을 압사와 뿌리 뽑힘과 절단의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그저 도시 생활에 만족하며 살 일이다. 자연을 몰아낸 도시야말로 자연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

이미 도시를 버린, 쓸데없이 예민한 나는 어쩌나. 자연을 위해 다시 어렵사리 떠나온 그곳으로 돌아갈 보따리를 싸야 하나. 아니면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죄의식으로 몸부림쳐야 하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