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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바람의 집 /조현미

바람의 집 /조현미

 

 

해종일 햇살이 넘나드는 마당 한쪽, 풍구가 서 있다. 비췻빛 페인트에 비와 바람, 햇살을 덧칠한 풍구는 예스러우면서도 준수하다. 밋밋한 몸에 井자 모양의 판자를 덧대 안정감과 멋을 취했고 여섯 개의 갈비뼈도 아직은 짱짱하다. 아가리가 넓고 큰 것이 먹성도 좋을 성싶다.

손잡이를 돌려 본다. 바람개비에 앉아 조잘대던 볕뉘들이 자지러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달아난다. 퀴퀴한 먼지와 알싸한 곰팡내, 마른 콩깍지 냄새, 비릿하면서도 들큼한 나락 냄새가 코를 비집는다. 바람이 등을 떠밀자 냄새의 넋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속을 고스란히 게워낸 풍구는 꼭 빈집 같다.

그에게선 진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모로 누운 강대나무 같았다. 꼿꼿한 자세가 생시나 다름없는데 영영 기침起寢을 잊은 몸은 미동이 없다. 간절한 초혼도 바람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자손들이 돌아가며 저승 갈 노자와 끼니를 챙겨드렸다.

"뭘 이렇게 많이 준다니? 무릇 사람은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야 하는 법이니라."

봄날 버들잎에 이는 바람 소리가 귓전에 걸려 있는데, 채 전하지 못한 말씀이 수두룩한데 혼을 벗은 육신은 그 어떤 기표도 수신하지 않았다.

한 생애가 세상으로 열린 문을 닫아거는 데까진 채 한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머리를 풀어헤친 바람과 흐느끼는 빗방울, 끝내 가슴께 이르지 못하고 사어가 되어버린 수만 마디와 함께 그는 흙으로 돌아갔다. 한 줌 볕살을 넣어드리고 싶었으나 차갑게 식은 하늘은 도통 안색을 펼 기미가 없다.

몇 겁이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흔네​ 해의 소풍이 저물녘, 그는 종종 귀를 빌려줄 틈을 청했으나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기억의 한 축을 망실한 그는 꼭 한쪽 날개가 내려앉은 바람개비 같았다. 알맹이 없는 말의 쭉정이들은 풍향조차 잃은 채 집 안팎을 떠돌았다. 중심이 되어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화두들, 빈 바람으로 돌아온 말들에 이제야 귀를 기울인다.

군데군데 살이 튼 흙벽 아래 정물처럼 그가 앉아 있다. 늙고 야위었으나 생기가 찰박한 눈이 봄날의 무논 같았다. 그는 늘 그 자리를 고집했다. 햇살 방석에 앉은 그가 조곤조곤 이야기의 얼레를 풀면 세상의 모든 바람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늘 이야기가 고픈 그와 정이 목마른 나는 이내 한 축으로 서로를 끌어안으며 훈풍에 합류했다.

누군가는 수다일 뿐이라 했지만 그의 이야기들은 나름 정연했고 고유의 가락까지 갖추고 있었다. 알곡의 중심어와 검불 같은 수식어를 적당히 까부르는 재주가 그에겐 있었다. 게다 이야기가 정점에 오를라치면 괜스레 뜸을 들이는 것으로 요전邀錢을 대신한 추임새랑 애교, 곡주를 챙기는 센스까지, 그쯤이었을 것이다. 망구望九를 바라보는 그와 이립을 갓 넘긴 나, 반세기쯤의 간격에서 부성父性을 읽게 된 건, 늘 응달에 두었던 그 집의 풍경을 양달로 옮겨 온 것은….

꼬투리 속 알곡이 몸을 풀 무렵이면 모처럼 붙박이 신세에서 벗어난 풍구도 바빠졌다. 콩이며 팥, 깨나 나락을 아가리로 받아 옆구리를 돌리면 바람이 놀치며 몽근 알곡이 발치에 수북했다. 잘 여문 들판이 한 뙈기쯤 들어찬 마당이 물너울을 거둔 바다마냥 잔잔했다.

가부좌를 튼 앉은뱅이 술상 곁으로 별들이 촘촘히 둘러앉을 무렵 그는 이야기보따리를 끌렀다. 쫄깃하면서도 재미가 깊은 이야기에 맘이 이우는 줄도 몰랐다.

그의 삶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

아홉 살, 채 여물지 않은 어깨에 지게를 얹었다. 또래 동무들이 한글을 깨칠 무렵 된비알을 오르내리며 바람을 익혔다. 샛바람이며 하늬바람, 마파람, 높바람과 얼추 친해질 무렵엔 무른 뼈도 제법 단단해졌다. 바람의 현을 읽고, 풍향을 에도는 법을 익힌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도 제 안에 이는 격정만은 잠재우지 못했다.

첫 부인과 사별 후 두 번째 아내를 맞은 지 얼마 안 되어 바다를 건넜다. 징용에서 돌아와 보니 부인은 집을 나간 후였다. 세 번째 부인에게 얻은 둘째가 막 걸음마를 뗄 무렵 또 한 여인이 그의 생에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이후 그의 삶은 잦은 바람으로 뒤척거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자식농사만큼 길미가 야박하고 낮잡은 게 있을까. 그에게 십일 남매는 마음 깊이 갈무리해 둔 볍씨였겠으나, 그들은 대개 그의 주변을 겉돌았다. 망백에 겪은 폐렴의 여진은 삶의 나침반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느 날부턴가 꼿꼿하던 그의 문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토씨들이 제자리를 잃는가 싶더니 중심을 잃은 어휘가 휘청거렸고 문장부호들이 행간을 검불처럼 떠다녔다. 아무도 자신에게 귀를 내주지 않자 그는 고장 난 전축처럼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그날은 그가 아흔네 번째 맞는 설날이었다. 햇살이 막 마루로 기어오를 무렵부터 약주를 한 그는 아내 줄이 끊어진 연처럼 식구들 사이를 부유했다. 겨우 그가 잠들자 누군가 묏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화두는 상속 문제로까지 치달았다. 왁자한 언쟁이 미닫이문을 넘어 마루로, 그가 든 사랑까지 건너왔지만 누구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가만, 풍구 앞에 앉아본다. 들깨밭 너머 그의 유택이 한눈에 들어온다. 피붙이들의 동선이 훤한 그곳을 생전 그는 자신의 묏자리로 점찍어 두었다. 그날 잠에서 깬 그는 아주 오래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에 일렁이던 촛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은 걸까. 불현듯 눈시울이 뜨겁다.

영정 사진 속 그의 눈동자는 푸른 듯하면서도 잿빛이고, 웃고 있는 듯하면서도 표정이 없다. 안방 벽에서 마루로, 부엌으로, 마당으로, 근처 텃밭까지 따라다닌다.

말년의 그도 그러했다. 그러나 한때 가장 열렬한 청자聽者였을 나 또한 그를 에돌았다. 꼬막처럼 입술을 다무는 날이 늘더니 끝내 말을 잃었다. 한 떼의 귀가 바투 그의 입술로 다가갔으나 산소호흡기 안에 갇힌 의미를 끝내 기호화 하지 못하고 한 생애가 저물었다.

그를 보낸 후 더러 불면을 앓았고, 누군가는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하고 물어 집안에 싸한 바람을 불러왔다. 그뿐이었다. 그가 손수 지었다는 기와집도, 문패 속 이름도, 사진 속 환한 웃음도 여전한데, 그만 없다. 그와 더불어​ 바람을 빚고 부대끼며 조율하느라 지문마저 지운, 여태도 기다림을 거두지 않는 풍구의 손이 못내 안쓰럽다.

그의 사십구재 날 저녁, 을씨년스럽던 하늘에 놀이 번지더니 주근깨 같은 별들이 촘촘하다. 문득 헤아려 보니 그와 함께 보낸 날들이 어언 열다섯 해, 열 살 이후 세상을 등진 아버지와의 추억보다 다섯 살이 많다. 그와 술상을 마주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 함께 고추를 딸 때, 아궁이 속 잉걸에 그윽이 취할 때 왔던 기시감의 출처를 이제야 알겠다.

그는 지금쯤 레테의 강을 건너 피안에 이르렀을까?

바람 한 점 없는 밤, 북두 눈망울 글썽한 별 하나 가슴 위로 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