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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꽃이 왔네 / 박헬레나

꽃이 왔네 / 박헬레나

 

 

초겨울 햇살이 발코니에 가득 쏟아지던 어느 날, 잎이 휘늘어진 양란분에 이상한 기운이 술렁거렸다. 조신한 매무새 어디에 그런 힘을 감추고 있었을까. 뭉툭한 촉이 셋이나 머리를 내밀었다. 이게 몇 년 만인가. 놀라움에 거실에 앉은 사람이 기겁을 하도록 탄성을 질렀다.

"꽃이 왔네!"

몇 년 전 집안 경사에 지인이 보내준 화분이다. 커다란 백색 도자기분에 다섯 개의 심비디움 꽃대가 초롱 같은 꽃송이를 달고 석 달 동안 거실을 밝혀주었다. 양란은 한번 꽃이 지고 나면 다시 피우기 어렵다며 내다 버리라는 것을 잎이 하도 싱그러워 발코니 한쪽에 밀쳐 두었다. 한지에 묵화 치듯 잎이 그려내는 곡선에 만족하리라 마음을 내리고 있었다. 앉은 자리가 더운지 추운지, 언제 목이 마른지 관심 밖이었다. ​열흘에 한 번씩 물을 주는 일 이외에 마음 한 자락도 내주지 않았는데 장하게도 꽃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고맙고 대견하다. 뿌리가 견뎌온 인고의 시간에 대한 화답이리라.

"꽃이 왔네!" 열일곱에 초경을 하며 당황해하는 내 앞에 어머니는 꽃타령을 하며 놀라움을 은근히 감추셨다. 약질로 성장이 더딘 내게서는 꽃을 보는 일도 남보다 늦었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내심 그날을 헤아리며 기다리고 있었던 듯, 새하얀 개짐을 건네주던 어머니의 손끝에도 설렘이 느껴졌다. 꽃이란 그런 것이다. 조바심치며 기다리다가도 만나는 순간 화들짝 놀라는 것, 기대와 설렘으로 가만히 앉아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 꽃이다.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생의 절정을 뜻함이며 한 몸이 완성되어 생명을 품을 수 있다는 신호이자 존재를 드러내는 시위다. ​

고고한 동양란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 해도 역시 난蘭이다. 그렇게 호락호락 얼굴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한 대에 여남은 송이씩, 녹두알같이 맺힌 봉오리가 강낭콩만 하게 불룩해지며 첫 송이가 꽃잎을 열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귀한 존재는 속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시간에 연연하여 허겁지겁 꽃 피울 수는 없다고 꽃이 수줍은 미소로 응답했다.

집 안에 봄 잔치가 벌어졌다. 심비디움의 뒤를 이어 게발선인장이 화사한 꽃을 매달더니 안스리움이 초록 잎사귀 사이로 빨간 꽃잎을 밀어 올린다. 저마다의 함성이다. 턱에 붉은 점이 스쳐간 유백색 얼굴의 양란, 그 우아함이 무리들 중 단연 돋보인다. 나는 공연히 들떠서 매일 아침 눈맞춤을 하고 그의 얼굴 앞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금년 봄은 화려했다. ​그리고 길었다. 피는 데 석 달, 피어서 석 달, 봉오리가 맺히는 초겨울부터 나는 봄을 맞이했다. 입동 무렵에 머리를 내밀던 꽃망울이 입춘에 맞춰 꽃잎을 열면 나의 봄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내 손으로 피워 본 꽃송이를 헤아리며 한 해의 절반 내내 행복했다.

봄이 깊어가던 어느 날, 꽃잎 끝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이 눈에 띄었다. 설마하며 손끝으로 찍어 혀에 대보았다. 달았다. 꿀이었다. 꿀이라니, 꽃의 향기와 꿀은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곤충을 유혹하는 수단이자 미끼다. 이곳은 벌 나비는 고사하고 날파리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는 아파트 창 안이다. 애틋하다. 기약 없는 임을 기다리다 허망하게 생을​ 보낸 구중궁궐의 궁녀 처지와 무엇이 다르랴.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인들 온전했겠는가. 이슬 한 방울, 바람 한 점 없는 삭막한 공간에 꿀이 될 자연의 재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건 꿀이라기보다 한 가슴 태워 짜낸 사랑의 진액이다. 하염없는 기다림과 목이 타는 욕망을​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피우고 누르며 긴 날을 견뎌왔을까. 식물에게도 음양의 조화, 생식 본능은 저리도 강렬한 것을.

예로부터 난은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의 사랑을 받으며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어왔다. 수수한 꽃과 격조 높은 향을 즐기는 난 애호가들 앞에 빛깔 화려한 양란을 두고 호들갑이 지나치다고 질책을 받을지 모르나 모든 꽃은 다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거친 내 손에서 피우기 어려운 난蘭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자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여린 꽃잎에 얹혀 있는 삶에의 의지, 무지에 가까운 우직함을 보는 순간 가슴에 뭉클 전율이 일었다. 한 생을 저토록 진지하게 몰입하며 살아왔는가 나는,

순서가 없는 사람의 명과 달리 꽃은 차례를 정직하게 지켜 피어난 순서대로 시들어 떨어졌다. 얼마나 많은 날을 기다려야 다시 만날지​ 기약 없는 이별이다. 잠시 왔다가 돌아가는 것, 생명은 그러기에 더욱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피는 날부터 지는 날을 걱정하는 나의 봄날은 끝이 났지만 그는 어느 날 다시 환한 얼굴로 내 뜰을 찾아올 것이다.

기다림! 내일도 내 것이라는 약속이 없는데 나는 다음 봄을 기다리며 뒷모습을 보는 서운함을 달랜다. 다가오는 꽃들이 있어 봄은 늘 희망으로 설렌다. 긴긴 기다림 끝에 그가 다시 피어나는 날, 나는 날씨에 아랑곳없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