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 위의 인생; 연애에 관하여 / 김만석
아득하다. 익숙함을 떨쳐내고 멀어져 가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주치는 넘어져 있는 플라스틱 물병과 바닥에 떨어진 체모들, 세탁 비닐에 담긴 어제 옷가지와 속옷들, 읽다가 만 책 속 이미 읽었던 문장들, 벽에 걸린 포스터. 내 것이었지만, 내 것이라고 도통 말하기 어려운 사물들뿐만 아니라, 내 몸도 내 의식으로부터 아득해지는 경우가 있다.
관절과 근육을 잇는 신경이 끊어지기라도 한 양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 원하지도 않는데 반응이 응답하는 몸. 그러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데도 술을 마시러 어느새 옷을 챙겨 입고 나서는 팔과 다리, 어쩐 일인지 집 밖에서야 후회를 하지만 이미 의식과 몸이 서로 멀어져 가면서, 사위가 어두워진다. 몸인지, 의식인지, 그 어느 것이 희미해지는 모르는 위태롭고 어두운 순간들, 파탄 나는 생활들, 일상들.
그러나 그 아득한 시간들, 기기묘묘한 순간들. 생활이 일상의 리듬을 상실하는 반복적 체험은 위험하지만 삶에서 반복되는 점에서 삶을 이끄는 매우 중요한 순간들이다. 오직 그러한 순간들에서만 몸과 사물을 만나는 탓이다. 내 연애의 생대가 문득 낯설어질 때, 그때야말로 나는 그녀를 만들 수 있으며 또 그녀와 결별할 수 있다. 결별을 통해서야 매번 그녀가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아채듯, 만남을 통해서 결별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체험에서야말로 그녀를 만나고 나는 드디어 만난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를 영원히 모르고 나와 그녀 사이에 놓인 이 아득한 거리에서 아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한 걸음 뗄 수 있는 가능성이 겨우 열리게 된다. 다시 말해 나와 그녀 사이에 어둠이 놓여 있어야만 한다는 것, 검고 아득한 거리가 있어야만, 만나게 되는 것.
아니, 내 삶이 이러한 검고 어두운 것들로 점철되어 있을진대, 이 끝없는 아득함이 내 삶의 원천이 아닐 수 있을까. 자동화된 일상에 미묘한 파문을 일으키는 이 체험들이 그 저 낯설고 마는 게 아니라 실은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가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어떤 신호일 수 있다는 말이다. 빛이 없는 세계를 보는 게 거의 불가능한 오늘날의 기술적 풍경에서 어둠을 경험하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러한 신호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세계의 실상과 조우한다면 나를 둘러싼 휘황찬란한 빛을 꺼야 할 필요도 있을 터이다. 사물과 세계를 조명할 때, 사물과 세계가 가진 검고 어두운 표면을 탈색시킬 위험이 농후하지 않겠는가. 몸의 시간, 주름을 펴거나 검버짐을 지우는 탈색의 행위와 관습이 지금 우리 삶을 부박한 방식으로 이끌어 온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해 사물과 세계를 함부로 빛을 비추어 밝히는 일을 멈추어야 할 수도 있다. 가령, 몸을 빛으로 조명할 때 비록 그러한 방식을 통해 아래 있는 몸이 낯설게 등장하더라도 그때 몸은 차갑게 식고 세계의 원천인 검은 표면으로부터 사라지기 십상인데 자기 얼굴과 몸을 풍경으로 ‘재현’하는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사물과 세계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연인의 사진은 그래서 편집증적 욕망과 의지가 만들어낸 추상화이지 구상화일 수 없다. 일테면, 연인의 몸은 눈/빛으로 조명해야 할 ‘살’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다른 체온, 다른 피부, 다른 몸짓, 다른 목소리, 다른 호흡이 말하는, 그 아득한 거리에 놓인 삶을 듣고 응답해야 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연인의 몸을 ‘만져/보면서’ 연인의 삶이 놓인 아득한 거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몸을 ‘만져/보는’ 게 아니라 연인의 삶을 모시는 일일지 모른다. 아득한 것들은 언제나 신묘하거나 오묘한 하늘의 이치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나타나고, 나타남으로써 모르게 되는 기가 막힌(자본주의적 기, 즉 회로가 막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목적과 욕망이 중지되고 그저 연인에게 이끌리면서 나아가는 아찔하고 얼떨떨한 행로와 다르지 않은 셈이다. 달리 말해, 그 검고 어두운 존재가 나를 이끄는 짙고 큰 검은빛이며 ‘나’를 매달리게 만들고 ‘나’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깊고 고요한 에너지라는 것이다. 일테면 연인은 내게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오묘하고 신묘한 이치를 탐구하게 만드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나는 玄 위에서 조심스럽게 발을 떼는 자이고 연인과의 絃이 지탱될 때에만 살아 있을 수 있는 자가 아닐까요? 오, 나의 동무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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