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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아버지의 군불 / 이상은

아버지의 군불 / 이상은

 

 

설을 쇠러 섣달그믐날 고향 집에 갔다. 아버지가 마른 소나무 토막을 깔고 아궁이 앞에 앉아 계셨다. 다가가 나란히 앉았다. 고향 집의 저녁 해는 아래채 지붕 위로 진다. 해가 아래채 지붕에 걸리면 아버지는 빈 쇠죽솥에 물을 채운다. 모르긴 해도 30년 아니, 40년도 더 된 아버지의 오래된 일과다. 이제 소를 키우지 않지만, 이는 멈추지 않는 아버지의 일상이다. 두어 달 전에 아버지께 이제 소는 왜 키우지 않느냐고 여쭈었다. 내가 이제 기운이 부치니 그만 남의 집으로 보내주었다며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으셨다. 그리고는 짐승도 한솥밥을 오래 먹다 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니 더 이상 정을 주지 말아야 한다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저녁때만 되면 마음 둘 데가 없는지 여물 대신 물을 붓고는 쇠죽솥에 불을 지피신다. 아버지는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마른 삭정이 가지들을 두 손으로 톡톡 부러뜨렸다. 가지가 부러질 때마다 아버지의 턱이 무릎 아래로 방아질을 했다. 아버지는 손가락보다 가는 나뭇가지들을 가지런히 아궁이 속에 쌓았다. 조심조심 바람길을 내고 불 자리를 만들었다. 불은 팔순 아버지의 숨소리처럼 노닥노닥 타올라 갔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던가. 아버지가 지금의 나보다 젊었을 때였다. 쇠죽을 끓이는 아버지에게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위엄이 있어 보였다. 아버지의 가슴만큼 올라오는 길고 굵은 부지깽이를 짚고 서서 아궁이의 불을 다스렸다. 생솔가지들을 수북이 아궁이 앞에 쌓아놓고 아버지는 도끼로 굵직한 가지들을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맥없이 잘려 나갔다. 마당에서 도끼질을 하실 때에는 모탕을 찍는 소리가 쩌렁쩌렁 뒷산을 울렸다. 아버지의 도끼질하는 주변을 동생과 나는 자주 맴돌곤 했다. 아버지처럼 힘찬 도끼질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친다. 나중에 커서 해라." 아버지는 단호했다. 동생과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부러운 눈으로 아버지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는 다가갈 수 없는 아버지만의 영역이었다. 동생과 나, 어머니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아버지의 도끼질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한 의식 같았다.

도끼질이 끝나면 아버지는 아궁이에 토막토막 잘린 생솔가지들을 던져 넣었다. 풀썩풀썩 연기와 불똥이 아궁이 밖으로 튀어 올랐다.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궁이가 꽉 차도록 생솔가지를 밀어 넣었다. 젊은 아버지의 생각대로 생솔가지들은 재단되고 아궁이의 불은 타올라야 했다. 거부할 수 없는, 젊은 아버지의 힘이요 고집이었다. 이내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은 아궁이 밖으로까지 날름거렸다. 멀찌감치 앉은 동생과 나의 얼굴에까지 뜨거운 화기가 전해왔다. 거칠게 흔들리는 불 그림자가 동생과 나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송진이 지글거리며 타들어가고 생솔가지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불속에서 누군가의 분노가 폭발하는 듯싶었다. 짐승 떼가 내달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함석지붕을 두들기며 지나가는 소나기 소리 같기도 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동생과 나는 그런 불길이 무서웠다. 불이 맹렬하게 저항하여 아궁이 밖으로 뛰쳐나올수록 아버지는 오히려 불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부지깽이로 불을 아궁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버지가 불과 싸우는 방법이었다. 물러서지 않고 마주 보며 맞부딪쳤다. 불똥 한 점도 아버지를 지나 동생과 내 쪽으로 넘어올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불과의 싸움이 끝날 때쯤이 되면 굴뚝은 조용해졌다. 아버지의 기세에 눌린 불길은 아궁이 안으로 솔솔 빨려 들어갔다. 한숨 돌린 아버지는 긴 부지깽이를 짚고 서서 도승처럼 저녁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생이 중학교를 마칠 때쯤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을 고등학교 진학 대신 공장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동생이 공장에 가기 전날이었다. 그날 불과의 싸움은 유독 치열했다. 아버지는 마당 쪽으로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은 듯이 가족들의 눈길을 피했다. 아버지는 연방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렸다. 눈물 같기도 했다. 아궁이의 불은 잠잠해졌지만, 아버지는 주저앉은 채 일어설 줄을 몰랐다. 무척이나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아궁이 앞으로 밀려나온 나무토막 불에 담뱃불을 붙였다. 한숨처럼 긴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내일은 니가 소죽 끓이라. 나는 네 동생 공장에 취직시키러 간다." 아버지는 벌겋게 타들어가는 아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날 저녁 무렵 나는 쇠죽솥에 물을 붓고 여물을 넣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연기는 눈으로 들어왔다. 동생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불이 타기 시작할 때쯤 대문 밖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너희 둘이서 쇠죽 끓여라. 내가 급히 다녀올 데가 있다." 동생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 급히 뭔가를 주섬주섬 챙겨 집을 나섰다. 동생과 나란히 아궁이 앞에 앉았다. 동생은 공장의 기계 소리와 낯선 사람들이 무서웠다며 가족과 떨어지는 것이 싫다고 하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공장에서 아버지와 헤어지는 순간에도 그랬다고 했다. 동생을 두고 몇 걸음 가던 아버지가 되돌아오더니 그 길로 바로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밤이 이슥해서야 취해 돌아왔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제 자식 키울라고 아버지 땅을 팔았습니다." 아버지는 늦도록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짐을 지고 언덕을 오르는 소처럼 끙끙 앓았다.

이제 내가 그날의 아버지처럼 아비가 된 지금, 아버지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허락하지 않던 아버지의 지엄한 공간에 들어와 나란히 앉았다. 늙은 아버지는 삭정이로 군불을 지피고 있었다. 삭정이를 태우는 아버지의 군불은 이제 힘이 빠져 아궁이 밖으로 불길이 박차고 나올 기력이 없었다. 이제 추억처럼 가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마디 짧은 기침에도 허리를 잘 펴지 못했다. 아버지의 솔가지 불살이 바람에 흔들릴 때 나는 바람을 막아서며 가슴을 졸였다. 나는 옆에 앉아 아버지의 군불이 오래오래 타기를 기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