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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흑점의 방 / 이인주

 

흑점의 방 / 이인주

 

 

새벽 두 시, 잠이 오지 않는다.

거실을 왔다 갔다 연애하는 처녀애처럼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한다. 뜨거운 불숨을 품은 청춘도 진즉 지난 가슴에 무슨 바람 들 일이 있을까. 허나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세상앓이가 어디 한 둘인가. 가슴의 정곡을 뚫고 가는 화살이 바람의 내상을 남긴다. 다 타고 재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불무덤을 파헤쳐 본다. 갸륵히도 살아있는 불씨가 있다. 놀랍다. 마지막 불씨일지도 모를 그것을 가슴에 품어 안고 행여 꺼질세라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독여본다.

세상은 내게 초록으로 도배된 방이었다가 활활 타오르는 단풍나무숲이었다가 심장을 굽는 철판이었다가 외로운 비행 끝에 불시착한 사막의 선인장이었다. 그런 새벽마다 나는 쓰러졌고 혼몽 속에 피어오르는 열꽃을 각성제처럼 삼키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고독의 싹을 파랗게 밀어 올렸다. 그 세월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비켜선 어떤 빛깔의 나무로 키울 동안 나는 겉돌았다. 아무런 혐의 없이도 구석에서 구석으로 숨던 시절이었다. 몸에서 몸으로 건너온 그 세월은 흔적이 없어서 더 간곡하다. 지극히 낯선 나의 표정이 그 어떤 충격보다 충격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손쓸 수 없었고, 참담하였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일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번지는 글자를 감당하는 일이다. 당연히 그것은 논리적 범주를 벗어난다. 비밀이 가득한 경전을 발견하고 독이 묻었을 지도 모를 글자를 침을 묻혀가며 읽어 내려 갈 때 인간은 살아있는 전율을 느낀다. 그 경전은 누군가의 가슴일 수도 있고 손일 수도 있고 표정일 수도 있다. 찰나에 읽히는​ 한 페이지를 내밀히 인화한 날은 나머지 일들을 모두 접고 내 방으로 달려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찬찬히 음미해 본다. 그때 아름답다는 말의 뉘앙스가 소금꽃처럼 피어오르며 호나한 개안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슴에서 가슴으로 불붙는 직정의 고요한 분화구를 들이게 된다.

오랫동안 나만의 방에 칩거해왔던 내가 요즘은 창밖 신천을 자주 바라본다. 물에 얼비친 수양버들이 저녁놀을 안고 쓰러질 때 물밑 바닥으로부터 반짝반짝 일어서는 잎새처럼 나도 어떤 존재의 그늘을 발치로부터 들어 올리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몇 가닥 소리의 진동이 다른 소리를 침범하는 듯하지만 제 고유의 진동수를 잃지 않는 것처럼 거기 그렇게 조용히 내 몸을 스미는 소리의 낱낱을 예민하게 울리는 공명통이 되고 싶은 것이다. 물소리와 바람 소리와 새소리, 소리 없는 것들의 소리까지 번역해 내는 몸주를 상상하며.

여름 내내 불덩어리 태양과 사투를 벌였다. 한없이 밝은 광구 속의 흑점처럼 체온을 식히고 싶었다. 스스로의 온도에 데여버린 상처는 복구될 수 없어서 검다. 일상이 줄 수 없는 신비한 힘이 태초의 잠처럼 내장되어 있는 불무덤 안에서 살아있는 혼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그 노랫소리는 때로는 서늘하도록 비장하게 때로는 그지없이 아름답게 들렸다. 그들의 노래는 나의 상처보다 더 큰 자장과 위무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퍼덕이는 물고기의 은빛 비늘이 악보의 하부구조를 이룬 인어의 몸짓 같은 노래였다. 바다에서 지상으로 닿는 길을 은밀히 열어주는 어떤 음률이 저 만만찮은 세상을 간단없이 후리리라는 예감이었다.

나는 가슴속에 나무와 칼을 하나씩 품고 산다. 날마다 나의 피를 조금씩 먹고 자라는 나무는 내게 흙탕물을 통과하고도 물들지 않는 야성을 요구한다. 나는 그가 사랑스럽다. 오직 야성의 수액만으로 전율할 수 있도록 나를 신선하게 걸러주는 나무를 부둥켜안고 살갗을 비벼댄다. 서서히 달아오르다 마침내 참을 수 없는 격정이 나를 찌를 때까지. 나와 나무와 칼의 오롯한 합ㄷ일로 한 문장을 거두는 것이다. 느낌으로 충만한 나무는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가! 내가 키운 나무가 나를 넘어서는 그 지점에서부터 나의 성장은 시작되고 스스로를 쳐내는 칼이 없다면 나무는 나무의 위용을 잃어버릴 터이다.

검은색이 천연색 꿈을 꾸고 싶은 것일까?

방을 침범한 어둠의 왼쪽 귀를 타고 전해질 내 방언의 고유한 진동수를 읽는다. 서쪽 창에 노을이 깊어진다. 계영배에 술을 채우고 없는 사람과 건배를 한다. 영창으로 경계를 넘은 앵두나무가 홍안을 띄운다. 세상을 떵떵거리며 주무른 손이라도 살 터진 허물까지 우려내지 않으면 맛이 없는 술이다. 잔을 채우지 않아도 앵두처럼 달아오른 내 마음, 풍경과 상처들이 그림자 진다. 세상이 내게 준 상처를 누룩처럼 발효시켜야 경전이다. 술잔에 찰랑이는 도강록 같은 글자들​, 겁 없이 훔치고 겁 없이 버린 삶의 내용물이 다시 마시며 나는 구수해진다. 술맛의 비밀을 토설하고 싶은 밤이다. 달거리가 가까워졌나 보다. 세상의 모든 검은 점들이 숨구멍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