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적戀敵 / 이양선
그는 잠에서 깨면 슬그머니 거실로 나갔다. 내게는 덤덤하다가도 돌아올 때면 어딘지 흡족한 모습이었다. 한때는 식구들 눈총에 집 밖에서 은밀히 해결했다. 그것도 잠시, 겨울이면 도무지 가장家長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며 버젓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그녀와 나는 무슨 연緣이 이리 깊어 서른 해가 넘도록 공생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유달리 보얀 피부를 지녔다. 몸매도 호리호리한 데다 낭창거리듯 가녀려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를 나는 백조라 했다. 이토록 오랜 세월 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남다른 오월의 풋풋함이라도 있는 듯싶었다.
그는 고충이 있으면 일단 백조에게 토로했다. 그녀의 황홀경에 취하면 기발한 묘수라도 일러주는지 장막이 걷히고서야 마지못해 운을 뗐다. 운동해라, 과음이 잦다, 지청구 잦은 나보다 연막까지 풍기며 새살거리는 그녀가 더 낫다고 여기는지도 몰랐다.
그가 노랑을 파랑이라 우기면 우선 그렇다고 응수해야 마찰이 잦아들었다. 노랑을 노랑이라 바로 세우려면 목청이 고단한 나머지 내 풀에 지칠 때쯤에야 겨우 인정했다. 그런 이에게 백조를 멀리하라고 종용하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한 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그의 독선은 국보급이라며 야유를 보내면 오기가 나서 더 자주 만났다.
그래서 외고집 아내는 바다만큼 마음이 넓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찬물에 이도 안 들어갈 그에게 어느 날 단단히 마음먹고 칠면조가 되었다. 평소와 달리 살랑거리며 비위를 맞추고 갖은 애교로 며칠을 구슬린 끝에 가까스로 백조와 단절하기로 했다. 성마른 성정에 마음 변하면 어쩌나 불안했지만 고맙게도 새 길을 곧게 걸어갔다. 마뜩잖은 면이 있어도 섣불리 자극했다 그르칠까 봐 애써 삭였다. 겨우 한숨 돌릴 즈음, 옥신각신하던 실랑이가 엉뚱하게 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는 타오르는 불에 기름 부은 격이렀다. 용케 구실을 찾았다는 듯 한달음에 백조 곁으로 갔다. 그녀는 피안의 세계인 양 냉전일수록 가까이했다.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백조와의 관계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유세가 가관이었다. 참새가 봉황의 깊은 속을 어찌 알랴!
계절이 거듭 바뀌면서 약속 같은 건 안중에도 없던 날, 한 유명인의 후일담이 전파를 탔다. 그도 모종의 백조와 함께 한 세월이 꽤 되었나 보다. 그녀 치마폭에 감춘 비장의 무기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영향력은 반향이 컸다. 뒤늦은 후회로 얼룩진 울림에 세인들은 진저리치렴 절교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강 건너 불이었다. 외고집이 제아무리 무기라도 이번에 도리 없으리란 희망이 허탈했다.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세상은 여전히 비 오고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 어느 날 모임에서 돌아온 그의 곁에 가무잡잡한 여인이 서 있었다. 뜨악한 나를 향해, 백조와 이별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잠시만 삼을 것이라 했다. 이 흑조라는 여인의 전자電子성은, 딱히 은닉한 무기랄 것도 없는 데다 백조인 양 욕구 해소엔 부족함이 없다며 위풍당당하기까지 했다. 세상에는 그들과 동거하지 않고도 견실하게 사는 이도 많건만, 그는 구구절절 그럴싸한 이유도 많았다. 내 전생은 필경 지은 죄가 많은 모양이다. 백조도 모자라 흑조까지 들여야 하는 형국이라니….
그의 당위성이 석연찮았지만 사뭇 진지한 태도로 보아 가식으로 보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엔 스스로 우러난 터라 자못 기대가 되었다. 그녀를 멀리하려는 의지는 분명 가상했다. 백조 향이 나면 안기조차 조심스럽다는 친구들 으름장을 적잖이 새긴 듯싶었다. 이번에야말로 가만히 앉아서 굿 보고 떡만 먹으면 될 일이었다.
그는 백조가 생각날 때마다 흑조를 만났다. 불면 날아갈 듯한 백조의 경박함에 비해 흑조는 육중한 몸에 금속까지 장착해서 듬직했다. 게다가 거북한 향은 물론 영육을 좀먹는 에너지도 낮다 하니 신비함까지 일었다. 식구들 거부감이 덜 하자 침상으로도 흑조를 들였다. 달갑진 않았지만 피하지도 않았다. 모든 가치 있는 건 얻기 힘들 듯 이런 시간은 조금만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뒷방 신세로 전락한 백조를 보니 앓던 이 빠진 것 같았다.
'잠시만'은 그 해 동지섣달을 넘겼다.
기억은 때때로 무서운 위력으로 다가왔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백조가 불현듯 생각나면 그는 불안한 나머지 서성거렸다. 서둘러 흑조를 만나고, 냉수를 마시고, 주전부리도 모자라 달음박질까지 했다. 방관만 하기엔 못내 안타까워 희망 고문을 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해낼 거라고, 누구보다 강한 집념을 믿는다고, 그럴수록 기를 쓰며 버텨왔던 끈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백조는 수시로 소곤거렸다. 양날의 검 앞에 그는 또 혼란에 빠졌다.
남자는 첫 정 준 여인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산다던가? 은근슬쩍 영접해 놓고 태연을 가장했지만 탐지기를 속일 수는 없었다. 언제부턴가 슬금슬금 야릇한 향이 나기 시작했다. 그간 백조에게 격조했음을 보상이라도 하듯 종국에는 바윗돌 같은 자존심마저 내려놓고 탕아를 자처했다.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긴 정은 흑조를 찬밥으로 내모는데 얼마 가지 않았다. 금 냥까지 들여 흑조를 맞았던 열정은 한낱 봄꿈에 지났다. 호언장담하던 대장부 기개는 어디로 가고 고작 필부로 돌아온 그에게 동정심이 갔다.
오늘도 그는 태연하게 불장난을 한다. 천지 간에 나만큼 어린아이 물가에 내놓은 심정으로 바라보는 이 있을까. 아무리 정이 끈끈하기로서니 자신이 몸져누웠을 때 그녀는 단 한 번이라도 달려와 주었던가. 그럼에도 가슴에 품고 사는 속없는 위인을 무연히 바라본다.
그가 그나마 일말의 양심만은 있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긴 하다. 건조한 나날 속에서도 조강지처가 처음 세상 빛을 본 날이나 면사포 쓴 날만은 신통하게도 기억한다는 점이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그의 마음 언저리에는 아내의 텃밭이 일구어져 있다는 것 아닌가. 평생 마음을 얻지 못하는 중에도 어쩌다 줍는 보석 같은 시간들이 나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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