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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싸리꽃 눈물 / 안귀순

 

싸리꽃 눈물 / 안귀순

 

 

숲은 회색빛 커튼을 드리우고 깊은 묵상에 잠겨 있다.

운문재 계곡에서 밤을 새우고 첫새벽 뽀얀 안갯속을 더듬어 가지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하절기엔 아침마다 안개비가 내린다는 신비의 명산, 촉촉한 서정으로 빛나는 검푸른 잎새들 사이로 너울너울 춤추는 생성의 기운, 하늘, 땅, 나무와 사람이 한 덩이 운해雲海에 실려 둥둥 떠내려갈 것만 같다.

오늘은 쌀 바위로 오르는 숲이 짙은 길을 택했다. 며칠 전 폭우가 할퀴고 간 탓인지 여기저기 무너진 산사태로 응달진 계곡은 양지가 되고, 볕 좋은 양지는 뭉텅 살점이 달아나 앙상한 뼈대가 드러난다. 어둠 속에 웅크린 세월 한 자락 질겅질겅 밟고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마음속으로 중얼대며.

늙은 상수리나무숲을 따라 가파른 고개 하나를 넘어서니 싸리나무 덤불들이 숲을 이루었다. 오늘 아침 아무도 스쳐가지 않은 듯 잎새마다 투명한 물방울을 매달고 휘청대는 싸릿대가 길을 막아선다. 부드럽게 얼굴을 스치는 보랏빛 꽃망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슬그머니 가지를 끌어와 킁킁 냄새를 불러본다. 야생화 특유의 아릿한 향을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향기 없는 꽃일까? 안개비에 젖은 탓인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모양조차 볼품없다. 꽃이라 부르기는 민망하고 나무라 부르긴 더욱 민망한 게 싸리가 아닌가? 아무리 용을 쓰고 자라도 어린아이 손가락을 면치 못하는 쇠약한 나무.

그러나 이 싸릿대는 의연히 태산준령을 지키고 있다.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휘청대고 산새들이 스쳐 가는 기척에도 놀라 움츠릴 것 같은 허약한 존재, 그러나 때로는 약해서 좋은 것도 있다. 약해서 부드럽고 바람에 휘청대며 유연해진 몸짓이 그것이다. 휘어질망정 쉬 부러질 줄 모르는 끈질긴 생명의 근성, 고분고분 순종할 줄 아는 미덕이 있다. 부리는 사람의 손에 따라 온갖 형태의 농기구로 변신했던 싸리는 농경시대에는 중요한 자원으로 사랑받았던 것 같다.

소박한 초가지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장독대, 그를 에워싸고 앉은 싸리 울타리, 그림처럼 출렁이던 강낭콩 덩굴, 흙 마당에 세워둔 바지개, 닳고 닳은 싸릿대, 몽당빗자루, 지난달 농가의 상징적인 그림이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밀치고 드나들 수 있는 어수룩한 사립문은 유순한 민심을 짐작할 수 있다.

싸리나무 성긴 소쿠리는 논밭의 거름을 나르고, 개울의 송사리를 잡기도 했다. 소나기가 후드득 스쳐간 뒤엔 감나무 숲을 뒤져 떫은 땡감을 주워 담기도 하고 개구쟁이 아이들을 훈계하는 회초릿감으로도 일품이었다.

껍질을 벗겨내어 하얀 속살로 만든 싸리 광주리는 시집가는 처녀들의 혼수 품목이었다고 한다. 빈 광주리 하나 옆에 끼고 시집와서 일가친척 피붙이들 알뜰살뜰 챙기며 정을 담고, 애달픈 사랑을 담고, 숨 막히는 시집살이 눈물과 한숨을 담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아니라도 가난한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함께 했던 보은의 나무일 듯.

이 싸리를 탐하는 이가 있었다. 전란 후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에 구호품을 보내주는 서구 열강 중에서 우리나라 야생 씨앗을 원했던가 보다. 싸리나무와 오리나무, 잔디 등의 씨앗들로 알고 있다. 그 당시 학교에선 아이들에게 씨앗 채집을 숙제로 주었다. 할당된 봉투를 채우기 위해 뒷동산 숲길을 휘젓고 다니던 어린 기억이 있다.

"사람은 은혜를 입으면 갚을 줄도 알아야 한다."

안남미, 하얀 밀가루, 헌 옷가지 등 전란의 폐허 위에서 허덕이던 이 나라에 구호 품을 보내준 인정에 보답하는 답례품이라 했다. 멋모르고 싸리나무 덤불을 헤치며 피멍이 들도록 씨앗을 훑어 내리던 그날이 엊그제만 같은데 단발머리 어린 소녀의 소박한 꿈을 안고 떠난 그 씨앗들은 지금 어느 산 외로운 골짜기에 뿌리를 내렸을까.

조국의 서글픈 운명에 떠밀려간 씨앗들, 그것은 비단 풀씨 만이 아니다. 얼룩진 역사의 강물에 떠밀려가고, 이념에 쓸려가고, 가난에 팔려 간 가여운 영혼들이 안개처럼 우주를 떠돌고 있지 않는가. 남의 나라 전쟁에 치욕적인 한을 남긴 종군 위안부, 그들은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옹이처럼 부여안고 있다. 꽃처럼 곱디고운 처녀가 짓밟힌 영혼을 서러워하며 힘없는 조국을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북망산천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건만 당당하게 고향을 찾을 수도 없는 이 망극한 현실을.

지구촌 곳곳에 입양되어 풀씨처럼 흩어진 전쟁고아들, 양공주들, 서독 광부들, 일제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 전쟁의 인질로 납북되어 아직도 혈육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애태우는 사람들. 그들의 한숨이 이 아침 싸리 숲에 맴도는 안개가 되었을까.

보랏빛 꽃망울에 방울방울 매달린 물방울이 눈물인 듯 서럽다. 가슴을 적시는 서늘한 안개비, 누가 저들의 눈물을 닦아줄까. 아픈 영혼의 통곡을 달래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