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기 위한 연습 / 박시윤
학창 시절 오래오래 한 가지 꿈을 꾸었다. 맨발로 어디론가 걷고 걷는 꿈이었다. 꿈의 끝에서 만나는 것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고, 온몸으로 전해져 오던 낯선 감각들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렀다. 충격이었고 두려움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빙의 들린 사람처럼 인근의 산이나 강둑을 혼자 배회했다. 꿈과 현실이 경계 없이 너울거렸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모든 것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여러 날이 흐르고, 소름 돋던 감각들은 몸 안에서 자연스레 녹아내렸다. 익숙해지고 있었다. 가장 단순하고 깨끗하게 내 것이 되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극에 치닫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그것은 평생 중독이 되었다.
밤새, 바람이 불었다. 굴곡진 능선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너른 들을 지나, 수없는 집들을 지나, 바람은 내게로 와 밤새 서성였다. 풀잎 떨리는 소리, 소쩍새 울음 흩날리는 소리, 시간이 증발해가는 소리, 바람은 그렇게 진한 카타르시스로 나를 깨운다.
널어놓은 빨래가 바짝 말랐다. 어제의 기록을 말끔히 지우고, 오늘의 기록을 위해 옷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른 새벽, 혼자 옷가지들을 정리하다 손끝에 묻어오는 까슬한 촉감을 만난다. 문득 떠나야겠다는 충동이 인다. 나는 오늘도 계획되지 않은 길을 떠난다.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 책을 읽다가…. 떠남은 '문득'으로부터 시작된다.
'잠시, 다녀올게요.' 간단한 메모지만 식탁에 올려두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물 한 병, 조금의 여비를 배낭에 넣는다. 텅 비어있는 배낭이 홀가분하다. 깃털처럼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늘 최소한의 몸이어야만 한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 잠시 떠남을 행했을 때, 벌어질 일들은 홀연히 잊자. 거리와 시간, 더위와 추위의 시시콜콜한 것들을 따지고 든다면 나는 지금 떠나지 못하리라. 당장 누군가의 아침식사를 걱정하고, 낮에 배달될 택배에 얽매여 떠나지 못한다면, 훗날 얼마나 많은 후회가 밀려들 것인가. 여태껏,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반복의 시간 속에서 절박했던 내 삶은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대문 앞에서 눈을 감는다. 오감을 활짝 여는 동안 혈관 곳곳을 누비던 바람의 입자가 최대한 낯선 바람을 따라가라고 귀띔을 한다.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갓 스무 살을 넘기던 해, 매일 떠나던 것이 일상이었던 적이 있다. 나는 어렸고, 그래서 더욱 용감했다. 누가 초대한 것도 아닌데 허락 없이 어느 숲으로, 어느 성城안으로 불쑥 불쑥 발을 들여놓았다. 몸이 나른하고, 현기증이 일 때면 어김없이 신발을 벗었다. 그래야만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돌의, 흙의 촉감이 좋았다. 기다시피 산을 오르고, 침묵으로 성벽을 탐닉하는 동안 물집이 잡히고, 터졌다. 발바닥에 가시가 박히고, 돌에 찢어져도 여전히 좋았다. 어느새, 군데군데 옹이처럼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좋았다. 꿈을 좇던 어느 한 시절의 때 묻지 않은 시간처럼.
어느 산장 구석에서 밤새 몸을 설치던 시간을 잊지 못한다. 별은 눈이 부시도록 반짝였고, 한여름 밤임에도 손이 시릴 만큼 공기는 차가웠다. 사흘 밤낮을 걸은 탓에 발목이 욱신거렸다. 이름 모를 능선에서 걸음을 멈추고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봉숭아 꽃물 들 듯, 온 세상은 어둠을 걷어냈다. 멀리서 밝아오는 아침은 천국 같았다. 빛은 평생 나의 등불이 되어, 내가 지치거나 습해질 때마다 떠나게 했다.
굶주린 도시에서의 숨 막히는 고통이 급습할 때면 나는 자연스럽게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영혼불멸의 묘약을 구하러 떠나는 전설 속 주인공처럼, 꼬리를 물고 어지럽게 엉겨있는 자동차의 흐름, 조급한 사람들은 경적을 마구 울려대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횡단보도의 질서는 또다시 엉겨버렸다. 출발을 기다리던 마라톤 선수처럼 오토바이, 자전거, 행인들이 꼬리를 물고 횡단보도를 지배해버린 자동차 행렬을 향해 마구 손가락질을 해댔다.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에잇, XX! 그가 말했다. "이보세요. 방금 뭐라 하셨어요?" 나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우며 인상을 찡그렸다. "나 원 참, 아침부터 재수 없이! XX"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그의 언어는 날이 제대로 서 있었다. 내가 한마디만 더 한다면 그는 주먹질을 해 댈 기세였다. 그가 바닥에 퉤-' 침을 뱉었다. 그 뒤에 남겨진 난자한 언어들의 핏빛 상처, 갑과 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들을 누르고 또 눌렀다. 그리고 돌아서서 나를 위로했다. 몸서리쳐지도록 날선 삶은, 나를 도시에서 추방하고 있었다.
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고, 계곡물을 퍼마셨다. 종일을 굶어 눈앞이 새하얗게 질릴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돌 언덕을 넘고, 풀숲을 헤치고, 나무들의 군락을 지나 새벽은 어느새 오후의 땡볕을 쏟아낸다. 아침도 점심도 거른 탓에 현기증이 인다. 다리가 당기고, 온몸이 조여드는 통증이 밀려든다.
텃밭에 홀로 엎드린 노파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절룩이며 맨발로 산을 내려오는 내게 노파가 말을 걸어왔다. 한 끼 밥을 부탁했다. 식은 밥 덩이라며 미안해하는 노파지만 내게는 진수성찬이었다. 묵은 김치 조각과 푸성귀에 슥슥 밥을 비벼 나눠먹고,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밥값 아닌 밥값처럼 늘어놓았다. 영감 세상 버리고 혼자 산지 십수 년, 늘 혼자 밥상을 대했다던 노파는 나와 함께 먹는 밥을 무척이나 신통해했다. 찢어진 발바닥에 밴드하나 붙여주며 또, 오라는 노파의 배웅을 받으며 해가 이슥해서야 오두막을 나섰다.
고통과 쾌감은 늘 함께 했다. 어느 치열했던 전쟁터에서, 살기 위해 숨어들었던 은둔의 동굴 속에서, 또 메마른 들판에서, 나는 죽어간 수많은 풍경을 만났고, 풍경 속 영혼들과 만나 하염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야만 하는 이유를 배웠다. 풍경들은 하나같이 내가 오래 머물지 않기를 원했다.
떠난다는 것은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연습이었을까. 도피하듯 찾아간 곳에서 내 영혼은 가장 가벼워질 수 있었다.
살며시 눈을 뜬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배낭이 나를 기다린다. 오늘은 또 어느 풍경 속으로 달려가 웅크리고 앉을까. 어느 나무 아래서, 바위 위에서, 깊은 계곡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물다 보면 다급하고, 불안했던 내 심장이 고요히 가라앉던 시간을, 때로는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소리를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리라.
아직 나는 갈 길이 멀다. 키워야 할 자식이 있으며, 늙어가는 부모가 계시지 않는가. 이 땅에 누구보다 푸르게 서야 한다. 조금 지치더라도 살아볼 만한 세상 아닌가. 산 정상에서 만난 쨍쨍한 햇볕을, 티 없이 흘러가는 맑은 계곡물을 마음껏 퍼 올려 내 삶으로 가져오리라. 삶이 풀리지 않을 때, 오두막에서 얻어먹은 노파의 단순하고도 단출한 한 끼 밥을 떠올려 보리라.
막연하게 떠나보자. 어떤 공식처럼 다시 건강하게 이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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