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은 피었는데 / 홍억선
열서너 살쯤 되었을까. 소년은 앉은뱅이책상을 등에 메고, 책보따리를 양손에 든 채 소백산 자락의 외딴 간이역에 서 있었다.
맞은편 산비탈에서는 감자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완행열차는 긴 몸체를 느릿느릿 뒤척이며 예천, 상주를 지나 김천을 거쳐 밤이 이슥해서야 대구에 도착했다.
소년은 다시 한 번 등짐을 다잡아 메고 역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공룡처럼 굽어보고 선 관광센터 앞에서 잠시 멈칫거리다가 중앙통을 지나 반월당을 가로질러 봉산동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소년의 유학 시절은 시작되었다.
소년의 도시생활은 무척 쓸쓸했다. 오라는 곳도 찾아 갈 곳도 없었기에 온종일 자취방에 엎드려 지내거나 때로는 봉창 너머로 수도산 비탈을 뒤덮고 있는 아카시아 숲을 바라보며 긴긴 해를 보내기도 했다. 그 고독의 방, 적막의 공간에서 비로소 소년은 춘원(春園)과 동인(東仁)을 만났고, 세계의 문호들과 첫 대면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외로움을 이겨내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런 때는 기차를 타곤 했다.
고향집은 간이역에서도 산등성이를 두어 개 넘어야 불빛이 아련하게 보이는 곳에 있었다. 어둔 밤길을 걸으며 소년의 등골에는찬바람이 일었다. 자칫 헛발이라도 놓았다가는 가시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수 있었고, 여우가 흙을 뿌리며 사람을 홀린다는 야시골도 지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산비탈에 접어들면서 칠흑 같은 밤길을 밝혀준 것은 온통 하얗게 핀 감자꽃이었다. 감자꽃은 소년이 고향집 사립문을 열고 "어무이, 저 왔니더" 하고 부리나케 대청마루에 오를 때까지 뒤를 쫓아와 초롱처럼 밝혀줬다.
이제 그 고향길을 비추던 산비탈의 감자밭은 흔적조차 가늠할 길이 없어졌다. 고향집도 사라지고 고향 사람들도 흩어졌다.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산을 깎고, 들을 메우고, 마을을 뭉개버려 망망대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소년을 도시로 떠나보낸 완행열차도 언제부터인가 산모퉁이를 돌아나오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소년의 대구 입성을 맞이했던 공룡 같던 건물도 자취를 감췄고, 반월당네거리의 덕산탕도 사라졌다. 그나마 얼마 전까지 남아 있던 소년의 첫 보금자리마저 재개발에 밀려 번지를 잃고 말았다. 그렇게 소년이 거쳐 간 흔적들은 돌아서서 비질이라도 한 듯이 말끔히 지워졌건만 이맘 때면 불현듯이 솟아나는 그리움을 어찌할 것인가. 지금쯤 감자꽃이 한창 피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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