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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사기등잔/목성균

사기등잔 / 목성균

 

 



시골집을 개축할 때, 헛간에서 사기등잔을 하나 발견했다.
컴컴한 헛간 구석의 허섭스레기를 치우자 그 속에서 받침대 위에 오롯이 앉아 있는 하얀 사기등잔이 나타났다. 등잔은 금방이라도 발간 불꽃을 피울 수 있는 조신한 모습이었다. ‘당신들이 나를 잊어버렸어도 나는 당신들을 잊어 본 적이 없어’ 하는 듯한 섭섭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등잔을 보고 적소(謫所)의 방문을 무심코 열어 본 권모 편의 공신(功臣)처럼 깜짝 놀랐다. 하얗게 드러난 등잔의 모습이 마치 컴컴한 방안에 변함없이 올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오래된 유배(流配)의 모습 같아서였다.
깊은 두메에 전깃불이 들어온 것은 일대 변혁이었다.

제물로 바칠 돼지 멱따는 소리와 풍물소리가 골짜기를 울리던 점등식 날, 마침내 휘황찬란한 전깃불이 켜진 방안에서 졸지에 처신이 궁색해진 등잔을, 사람들은 흐릿한 불빛 아래서 불편하게 산 것이 네놈 때문이란 듯 가차없이 방 밖으로 내쳤다.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얕은 인간의 마음인 걸 어쩌랴. 이 등잔도 우리 식구 중 누군가가 그렇게 내다버렸을 것이다.
등잔은 너무 소박하게 생겼다. 그래도 방안에 두고 쓰는 그릇이라고 백토로 빚어서 잿물을 발라 구워 낸 공정(工程)이 정답고 애잔하다. 몸체의 뽀얀 살결과 동그스름한 크기가 아직 발육이 덜 된 누이의 유방 같은데, 등잔 꼭지는 여러 자식이 빨아 댄 노모(老母)의 젖꼭지 같이 새까맣다. 그 못생긴 언밸런스를 우리는 당연히 고마워해야 한다. 가난하고 고달픈 밤을 한 점 불빛으로 다독여 주던 등잔 아닌가.

도대체 이 등잔은 어느 방에 있었던 것일까.
옛날에 우리집에는 안방 등잔부터 윗방, 건넌방, 사랑방, 부엌 거까지 합치면 등잔이 다섯 개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중 이 등잔은 어느 방에 놓여 있던 것일까?
깊은 겨울밤, 처마 밑에 서리서리 이어지던 할머니의 물레질 소리와 어머니의 이야기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걸 보면 안방에 있던 등잔 같기도 하고, 한쪽 무릎에 세우고 그 위에 수틀을 올려놓은 누이의 다소곳한 그림자를 비추던 불빛을 생각하면 윗방에 있던 거 같기도 하고, 쿨룩거리는 기침소리와 함께 밤을 지새우던 불빛을 생각하면 바깥 사랑방에 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러나 등잔 꼭지가 이토록 까맣게 탄 걸 보면 불면의 흔적이 분명한데, 그러면 혹시 건넌방 내 책상 위에 있던 등잔일지 모른다.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내게 관심을 보여 주신 그 소중한 등잔, 딱 한번 아버지의 애정을 자식에게 중재해 준 그 등잔 같다.

어느 해 겨울밤이었다.
가끔 추녀 끝의 이엉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참새도 잠 못 이루는 밤. 누가 오는 것 같아서 방문을 열어 불빛 밑으로 눈송이가 희끗희끗 내려앉은 밤이었다.
잠잘 시간을 넘긴 생리현상 때문일 것이다. 등잔 불빛이 점점 흐려졌다. 나는 자꾸 등잔의 심지를 돋웠다. 새까만 그을음 줄기가 길게 너풀너풀 춤을 추었다. 방안에 매캐한 글음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를 읽고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안나’가 시골 역 플랫폼에 내렸다. 헤르만과 롯데가 마중 나와 있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젊은 날의 사건이 바야흐로 시작되는 대목이었다.
가끔 방문을 열고 그을음 냄새를 바꾸었다. 상큼한 눈바람이 방안에 봇물처럼 밀려들어와서 가득 찼다.
밤이 깊었다. 뜰에 올라서서 ‘탁- 탁-’ 눈 터는 소리가 나더니, 밤마실을 다녀오시는 아버지가 찬바람을 안고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이 녀석아, 심지만 돋운다고 불이 밝아지는 게 아녀, 콧구멍만 글을 뿐이지.”
아버지는 조신조신 말씀하시며 호롱의 심지를 새로 갈아 주셨다.
“심지는 깨끗한 창호지로 하는 거여. 그래야 맑은 불빛을 얻을 수 있지. 심지 굵기는 꼭지에 낙낙하게 들어가야 해. 굵으면 꼭지에 꼭 끼여서 기름을 못 빨아올리고, 가늘면 흘러내리느니. 그리고 꼭지 끝에 불똥을 자주 털어 줘야 불빛이 맑은 거여.”
심지를 갈자, 과연 불이 한결 밝았다.

내가 아버지께 받아 본 단 한번뿐인 성의 있는 관심이었다. 늘 밤길의 먼 불빛처럼 아득해 보이던 아버지가 마음을 내 눈앞에 펴보이신 것이다. 그날 밤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장롱 맨 아래 간직해 둔 사주단자보다도 더 소중하다.
겨울밤의 냉기를 몰고 불쑥 방으로 들어오셔서 소년의 두 뺨을 따뜻하게 달구어 주신 투박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어 준 등잔, 그 등잔의 고마움을 나는 전깃불에 반해서 헛간에 내다버리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등유와 먼지에 절은 받침대와 등잔을 깨끗하게 닦았다. 소장품으로 예우를 하고 싶어서다. 내 마음은 등잔을 아들 방 책상 위에 놓아 주고 싶었다. 물론 아들녀석이 등잔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울 리는 없다. 나는 내 아버지처럼 아들을 위해서 등잔 심지를 갈아 줄 기회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젊은 한 시절 헛되이 보내지 말고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으라는 내 간곡한 당부의 마음을 등잔이 아들에게 전해 주기는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등잔에다 아무리 인문주의적 가치를 부여해서 아들의 책상 위에 놓아 준들 등잔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아들이 애장(愛藏)할 리 없을뿐더러, 등잔 역시 아들의 책상에 놓인 전기 스탠드의 놀라운 밝기에 스스로 주눅이 들어 처신이 궁색할 뿐이다. 그것은 등잔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등잔을 벌 세우는 짓이다. 차라리 헛간의 허섭스레기 속에서 한때 당당했던 발광(發光)의 보람이나 추억하며 지내게 둔 것만도 못하다.
그래서 등잔을 안방 문갑 위에 놓아 두기로 했다. 그리운 어둠을 발갛게 밝혀주는 한 점 불빛, 그윽한 아버지의 심지(心地)를 느끼기로 했다.
아버지는 중풍이 들어 계신다. 등잔의 불빛처럼 흐린 생애, 심지를 갈아 드릴 수도 없다. 조만간 그 불빛마저 꺼지면 나는 아버지의 생애도 등잔처럼 푸른 산자락에 묻고 잊어버릴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