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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호박 / 정재호

호박 / 정재호  

 

 

 

우수가 가까워지면 담 밑에다 드문드문 호박 구덩이를 파 놓고서 거기에다 똥을 그득하게 퍼부어 놓고는 흙으로 덮는다. 그래야 굵은 호박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꽃이 핀 다음에 거름을 주면 호박이 여물기 전에 다 빠지기 때문에 옛날부터 밑거름으로 퇴비 대신 분뇨를 이용해 왔다.

호박씨에서 싹이 트고 나서 덩굴이 담 위로 기어오르면 여름이 성큼 다가선다.

시골에서는 반찬이 없으면 호박잎을 쪄서 쌈을 싸 먹기도 하고, 또 그것을 뜯어 넣고는 국을 끓이기도 한다. 호박은 1년 내내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된장을 끓일 때엔 애동호박을 썰어 넣기도 하지만 국을 끓일 때나, 지짐을 붙일 때나, 범벅을 할 때도 호박은 약방의 감초처럼 긴히 쓰인다.

호박은 알뜰히 가꾸지 않아도 1년 동안 우리의 식탁을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에 농민들에게는 관음보살 같은 고마운 존재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곡식은 다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나물죽이 아니면 호박범벅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서 우리에게 호박은 단순한 식품이 아니고 생명의 은인처럼 고맙게 느껴진다.

그런 호박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갖은 구박과 천대를 했을 뿐 아니라, 호박꽃을 못난 여자의 얼굴에 비유하면서 괜히 호박을 타박하며 천덕꾸러기로 여겨왔다. 배은망덕한 짓이다.  

나는 지금 어느 화가가 그린 호박 그림을 보고 있다. 4호짜리 화면에 꽉 찰 정도로 잘 익은 호박 한 개가 그려져 있어, 보면 볼수록 정이 깊어진다.

그 호박 그림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호박이 아니라 늙은 여인의 얼굴이다, 밭을 매다가 허리가 아파서 밭고랑에 퍼지르고 앉아 있는 모습 같기도 하고, 자식을 키워서 객지로 다 떠나 보낸 뒤에 명절이 되어도 찾아오지 않는 자녀들을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고 앉아 있는 모습 같기도 하고,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속세 를 떠나 어느 절에 가서 염주를 세면서 여생을 보내는 보살의 얼굴과도 같이 보인다.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여 줄곧 호박만 그려 왔다고 한다. 그는 여러 차례 입상도 하여 화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그가 그린 호박을 모두 합하면 만 덩이가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호박 그림에는 농민 애환이 담겨 있고 우리 민족의 깊은 사상이 스며있다.

호박의 원산지는 동인도라고 하는데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서 우리의 것이 되다시피 되었다.

호박도 기후에 따라 그 생육이 다르기 때문에 동양호박과 서양호박은 그 맛이 다르다고 한다.

서양산은 녹말이 많고 맛이 있어서 주식 대용으로 사용하는데 비해 동양에서는 그만 못하여 부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나는 마음이 언짢을 때는 호박 그림을 본다. 그러면 호박은 꾸밈없는 모습으로 나를 위로해 준다.

때로는 꽃을 피워 삭막한 농촌 아이들에게 장난감이 되어 주기도 하고, 잎사귀에서 줄기, 열매까지 농민을 위해 바치고도 비료를 많이 달라고 보채지도 않으며, 알뜰히 보살펴 달라고 앙탈을 부리지도 않고 내다버리는 개숫물이나 어린애 기저귀를 빤 물만 주어도 고맙게 여기며 여간해서는 병에 걸리지도 않고, 한번도 남을 해치지도 않으면서 제 힘으로 나무나 풀을 붙들고 조용히 살아간다.

호박은 예쁘지도 않고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며 영양가가 풍부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호박은 보면 볼수록 덕성스럽고 먹으면 먹을수록 깊은 맛이 있다.

호박은 철따라 유행 옷을 바꿔 입는 도시의 세련된 여인도 아니고, 말을 잘 하고 교양이 있고 매력이 넘치는 지성적인 여인도 아니고 늘 봐도 그 모습으로 남에게 넉넉한 인정을 베풀고 가난하게 살아도 인심만은 푸짐한 시골의 여인이다.

세상 사람이 자기를 보고 호박 같다고 해도 조금도 화를 내거나 토라지지 않고 늘 봐도 헤픈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우리 누님의 얼굴이다.

면도칼처럼 남의 심장을 찌르는 말을 함부로 내뱉는 현대 여성보다는 꾸밈없고 진솔한 심정을 낮은 목소리로 말할 줄 아는 그런 여인이 왠지 좋다.

호박처럼 둥글둥글하게 누구와도 쉽게 사귈 수 있는 좀 모자란 듯한 여인이 우리의 누님이다.

세상이 너무 메말라 가고 인심이 무섭게 변해간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남을 짓밟고라도 꼭대기에 올라서려고 아우성들이다.

호박이 그립다. 호박같은 인심이 그립다. 콩 한 개가 있으면 이웃사람을 불러서 기어이 나눠 주던 시골 사람들이 그립다.

그들은 다 어디 가고 가슴에 시퍼런 비수를 품은 사람들만 서로 노려보고 있는가.

못났어도 좋으니 호박 같은 여인을 만나서 은근한 눈짓이라도 나누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