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보리밥 / 김광남

 

보리밥 / 김광남


 

 

 

  웰빙wellbeing시대라면서 고기 보다는 채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요즘은 살과의 전쟁이라면서 얼마 전 모임 후에 채식만으로 차려낸다는 어느 보리밥집 엘 갔다. 그 식당은 앉을 자리가 없이 북적거렸다.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이 먹던 밥이 보리밥 아닌가. 이밥(쌀밥)보다는 맛이 없고 먹고 나면 방귀가 자주 나오지만, 옥수수밥 보다는 한결 부드러운 밥이 보리밥이다. 보리방아를 찧을 때 보리 겉껍질을 벗겨내고 속껍질인 보리등겨를 둥글 넙적하게 빚어 밥솥에 찌면 보리개떡이 된다. 이 개떡을 간식으로 많이도 먹었다.

  언제부터인가 배가 나오고 살진 사람이 많아지면서 비만이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었다. 살 졌다고 하면 몸 관리를 잘못했다는 비난으로 들려 싫어했고, 건강하다는 말은 못 듣는다. 입맛에 좋은 고기를 즐겨 먹고 차를 많이 타고 다니다 보니 운동량이 부족해서 살이 찌는 원인이 되지 않았나싶다. 건강해지는 방법이 운동을 해서 근육을 단단히 만들고 땀을 흘려 노폐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것은 모두가 아는 상식인데, 굶거나 약물로 살찌지 않는 음식으로 쉽게 건강을 다스리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음식집 간판에 웰빙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손님이 많이 찾아올 것이라는 얄팍한 상혼도 한몫을 한다.

  1951년 1·4후퇴 때 피란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동네는 폐허가 되었다. 집은 폭격에 폭삭 무너져 숯이 된 곡식 알갱이와 주춧돌만 남아있었다. 면사무소에서 배급을 타온 보리쌀은 골진 양쪽 끝에 보리 겉껍질이 노랗게 붙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사람이 먹는 곡식이라기보다 말이나 소가 먹는 먹이에 더 가까웠다.

  여덟 식구가 보리밥을 해먹으면 삼사일 정도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열흘을 먹고 살려면 보리쌀을 맷돌에 타개서 뜯어온 나물과 섞어 나물 보리죽을 쑨다. 얼굴이 비치도록 멀겋게 쑤어야 겨우 열흘을 드텨먹고 살 수 있었다. 멀건 죽을 먹을 때 덜 까진 보리 껍데기가 뜨끔거리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생각이 난다. 그나마 하루 두 끼 밖에는 먹을 수가 없었다.

  트럭의 짐칸에 타고 ‘샤스’를 걷어 올려 배에 찬바람을 쏘이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배가 고프지 않다는 이웃집 아저씨의 이야기. 그때는 배고프지 않게 하는 한 방법일 수 있겠구나, 지금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정말 그렇게 믿었다. 어려운 세대를 산 아버지가 낭비가 심한 아들에게 쌀이 없어 끼니를 걱정하며 배를 곯던 이야기를 했다. 쌀이 없으면 라면이라도 끓여먹으면 되지 왜 굶느냐고 했다는 우화 같은 얘기가 있다.

  영월군 북면에 공기라는 마을이 있다. 재를 두 개나 넘고 개울을 여럿 건너면 개울 두개가 합치는 널찍한 곳을 장광長廣이라 불렀다. 이곳 위쪽에 외할머니 댁이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으레 나와 동생이 올 줄 아시고 방학 내내 외할머니는 이 장광까지 나와서 동생과 나를 늘 기다렸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니 방학 말미에 가게 되면 여러 날을 기다렸던 외할머니. 내 모습이 보이자마자 먼발치 까지 좇아 나오셔서 내 강아지들 왔다고 반가워 얼싸안으셨다.

  점심에 해주시는 햇보리 밥이 참 맛있었다. 따끈한 보리밥에 보리고추장을 넣고 비비면 햇보리 밥과 고추장이 어우러진 냄새가 좋았다. 눈물을 질금거리도록 매워서 입을 호호불면 외할머니는 장사라고 추켜세웠다. 지금도 보리고추장 냄새가 나면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오늘 식당에서 먹은 보리밥에선 외가에서 맡던 정겨운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맛의 향수를 느껴서일까, 보리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왔지만 왠지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요즘 북한에는 기근이 심해 6·25 사변 때 보다 더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양식을 구하려고 국경을 넘어 중국이나 연변으로 목숨을 걸고 넘어 간다. 한 탈북자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다. 구호품 라면 한 봉지를 가지고 4~5명이 삼일을 버티고 있다고 한다. 봄부터 말려 놓은 나물과 라면 한 개를 큰 솥에 물을 가득히 붓고 끓여 라면은 젊은 사람과 아이들이 먹고, 끓인 나물은 나이든 사람이 조금씩 먹었다고 한다. 지금 북한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인육을 먹는 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한 민족인 남과 북이 철책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서는 웰빙 식사로 보리밥을 먹으며, 살과의 전쟁을 하고 있다. 한편 북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기아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통일이 되어 우리가 저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소문의 정황을 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낸 구호양식이나, 세계 여러 구호 단체에서 보낸 식료품이 굶주리는 저들의 밥솥에 제대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반세기가 넘도록 남북이 서로 통일이라는 말만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