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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 시

[명시]한밤의 음악편지 / 이윤택

 

한밤의 음악편지 / 이윤택

 

 

 

누가 냉장고 전기 코드를 뽑아 놓았길래

먹을 게 퍽퍽 썩고 있는 거요 어, 그게 냉장고 선인가

그 줄 뽑아서 전기 다리미에 꽂았다

뭐 이런 일인데 혀 한두 번 끌끌 차면서 넘어갈 수 있는데

여편네는 따발총을 쏘았을 것이고

노모는 기죽기 싫어서 주둥이를 쥐어박았을 것이다

아이코 이 할마시가…… 그러면서

여편네는 마른 장작 같은 화력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노모는 이 악독한 년 그러면서

악독한 여자의 머리칼을 닭털 뽑듯 뽑았을 것이다

채경이는 재빨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또 쥐새끼로 둔갑했을 것이다

안 보아도 눈에 선하다

콩가루 집안이다 나무 명패를 집어 던지고

아이코 이 고마운 코피 이제 넌 물 건너갔다

아주 각설이타령 하는구나

여편네는 당장 이혼하자고 전화통에 대고 악을 쓰고

저년 껍데기를 홀랑 벗겨서 당장 내쫓아라 불호령

TV는 차라리 송출 전선을 끊어버렸다

여기서 이 말 저기서 다른 말 피곤한 싸움 말리지 말고

이 깜깜한 밤 몸서리 치도록

손 털고 일어서자고

석탄 백탄 타는데

우리의 이윤택 디스크 플레어는 유일하게 남은 FM 89,1 MHZ 채널에

그리운 금강산을 실어 보낸다

안녕하십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

결코 잠 못드는 여러분을 위해 이어지는 목포의 눈물

채경이를 위하여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찾는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십 년을 살아도 뻘밭이다

잠들 집이 마땅찮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 한밤의 음악편지는 중단되어서는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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