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살무늬 / 염정임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점점 따뜻해져서 가구들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 창문을 가리고 있던 사방의 탁자를 거실의 벽 쪽으로 옮기고, 그곳에 꽂아 놓았던 책들을 모두 치우고 도자기를 하나씩 올려놓았다.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을 때와는 달리 사방탁자의 시원하고 단아한 모습이 도자기와 잘 어울려 눈을 즐겁게 한다.
수직으로 네 단으로 나뉘어진 사방탁자에 백자 도자기들을 놓고 한 단에는 내가 좋아하는 분청사기 대접을 올려놓았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한 도예가가 만든 것으로 분청의 회색 바탕에 흰 태토(胎土)를 발라 귀얄 붓으로 붓 자국을 낸 그 자유분망하고 꾸미지 않은 투박함이 정겨운 그릇이다.
나는 이 분청 대접을 보며 어느 박물관에 있는 빗살무늬토기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어두컴컴한 박물관 한 구석, 유리 진열장 안에 놓여 있던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에서 발견되었다는 갈색의 커다란 토기는 군데군데 깨어진 조각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몸체에 선연하게 남아있는 빗살무늬---. 마치 머리빗으로 그어놓은 듯 한 사선(斜線)의 줄들이 규칙적으로 어긋나게 그려져 있었다. 토기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몇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빗살무늬토기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기에 그들은 빗살무늬 토기로 그 존재의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인가. 처음으로 그들이 그릇을 만든 것은 곡식이나 음식을 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릇에다 빗살무늬를 그린 것일까.
아마 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서 흙을 반죽하여 그릇을 만들어 햇볕에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에 무심코 꼬챙이나 새의 뼈 같은 것으로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줄도 긋고 점도 찍으며 인간에게 부여된 원초 적인 미의식(美意識)으로 빗살무늬를 그려갔으리라.
어쩌면 농경생활을 하던 그들이기에 비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빗발 같은 사선으로 그렸을 것이다. 혹은 그들에게 보이는 나무, 강물, 사람들을 나타낸 것인지도…. 구석기인들은 거친돌로 사냥을 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동굴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음습한 동굴을 벗어나 햇볕과 대기를 벗 삼게 된다. 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돌을 갈아 낚시 촉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한다. 그들은 자연을 경외하며 누구나 평등하게 모듬살이를 하였을 것이다. 그들 뒤에 나온 청동기인들은 이미 계급사회가 형성되어 지배인과 피지배인이 생기고, 무기를 만들어 전쟁을 하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의 토기들이 아무 무늬 없는데 비해 신석기 시대의 토기에만 빗살무늬 가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 신석기인들이 그만큼 평화를 사랑하고, 그만큼 여유 있는 마음 가짐으로 삶을 살았다는 표적이 아닐까.
그들은 끊임없는 자연의 재해나 맹수들로부터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절박한 생존의 위협 가운데서도 그들은 토기를 만들고 빗살무늬를 그렸던 것이다. 그들이 그은 줄 하나 하나는 모두 그들의 꿈이며 바람이며 눈물이었으리라. 빗살무늬를 그리면서 그들은 고요한 마음의 바다에 다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후대의 우리 선인(先人)들이 난초를 치면서 또는 목죽(木竹)을 그리면서 얻고자했던 평정함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외침이나 정변 등으로 불안정했던 환경 가운데서 도 선인들은 온화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그들의 자연을 표현했다.
그들에게는 각박한 현실을 뛰어넘어 해학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여유의 멋이 있었다. 빗살무늬는 바로 그런 우리의 정서의 원형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그 간결 하면서도 소박한 줄무늬는 어느 현대 미술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요즈음 같이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도예가들이 흙을 만지고 물레를 돌려 도자기를 빗는 모습을 보면 잃어버린 자연을 되찾은 듯 푸근한 마음이 된다. 특히 가마에 불을 지펴 도자기를 굽는 정경은 석기시대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흙이 도예가의 손으로 빚어지고 구워져 도자기가 되면 그 흙의 냄새는 거의 맡지 못한다. 그러나 토기나 분청사기는 어딘가 흙냄새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분청사기는 굽는 과정에서도 가장 제약을 안 받고 가장 자유롭게 구울 수가 있다고 한다. 흙이나 불에 까다롭지가 않아서 작업이 즐겁다는 것이다.
나의 시선이 머무는 분청사기 대접은 문명생활에 쫓기는 나의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해준다. 귀얄 붓으로 활달하게 그려진 줄무늬는, 마치 흙마당을 대빗자루로 깨끗이 쓸어 그 빗자국이 선명히 드러난 것처럼 정결해 보인다. '마당을 깨끗이 쓰는 비'와' 하늘에서 내리는 '비',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는 빗'은 혹시 같은 어원(語源)을 가진 낱말들이 아닐까. 이들이 만드는 무심한 줄무늬는 이다지도 고즈넉한 울림으로 내 영혼을 설레게 하는 것일까.
나의 내부에서 때때로 솟구치는 표현욕과 순치 할 수 없는 목마름. 이 또한 석기인들로부터 유전된 갈망이리라.
내가 원고지에 한자한자 글을 메우는 작업은 바로 석기인들이 빗살무늬를 그리던 행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글, 나의 삶도 언젠가는 빗살무늬처럼 균형과 조화를 동반하여 고요한 정밀 (靜謐)의 세계에 이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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