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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왜 시인은 사랑노래를 부르는가 / 한승원

왜 시인은 사랑노래를 부르는가 / 한승원

 

 

 

 

 

잡지를 만드는 친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곧 대답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신은 왜 글을 쓰십니까?”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뜸 “아이구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대통령시험문제처럼 어려운 질문을 하고 계십니까?”하고 농을 한 다음 한 시간쯤 뒤에 대답을 해 주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문 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글쎄 나는 왜 글을 쓸까.

이때 생각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시는 연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때의 연가(戀歌)라는 것은 사랑을 바치는 노래일까. 사랑을 받는 노래일까. 사랑을 찬미하는 노래일까. 사랑하는 순간의 황홀감을 노래한 것일까.

어쨌든지 연가는 사랑을 하든지 받든지 하는 순간의 불처럼 뜨거운 가슴을 노래한 시일 터이다. 그런데, 그 연가를 부르는 대상은 어떤 것일까. 소월이 부른 사랑노래의 대상은 무엇이었고, 만해 한용운이 부른 사랑노래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윤동주라든지 이육사라든지……이 세상에 나왔다가 소리쳐 사랑을 노래한 시인들이 대상으로 삼은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살아서 꼼지락거리는 미물에서부터 발버둥치며 죽어 가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굳어져서 숨쉬지 않은 것에서부터 출렁거리며 흐르는 물이나 둥둥 떠 가는 구름이나 혼자서 타오르는 노을이나 비풍에 떨어지는 낙엽에 이르기까지, 산 위에 올라앉은 하느님이나 우주 안을 가득 매운 부처님의 숨결이나 밤을 밝히며 내리뻗히는 새벽빛 한 줄기나 여름 가뭄에 소나기처럼, 언젠가는 올 그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그것을 노래한 그 시인만 알고, 또한 그 시를 뜨거운 가슴으로 소리쳐 외우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그 시인들은 왜 그러한 사랑의 모래를 불렀을까. 왜 그렇게 노래 부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줄광대는 줄을 타다. 아슬아슬하게 드높은 곳에 외줄을 매달아 놓고 그 줄을 타면서 dhais 재주를 다 피운다. 다리 한 번 삐끗하고 발가락 하나 잘못 벌려 디디면 그야말로 지옥 아래로 곤두박질을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줄광대는 줄을 팽개치고 도망질을 치지 않고 왜 그처럼 평생토록 줄을 탔을까.

소리꾼은 미욱스럽게 평생토록 소리를 했다. 소리를 하다가 목이 쉬면 그 목이 터져 피가 나오도록 소리를 했다.

피가 나오면 똥물을 떠서 마시고 다시 소리를 했고, 폭포수 우르릉 쾅쾅 소쿠라지고 펑퍼져 흐르는 곳에 앉아 소리를 했고, 밤이면 호젓한 공동묘지에 가서 귀곡성을 익혔고, 이 선생 저 선생을 쫒아다니면서 여러 리듬들을 익혔고, 산간의 동굴 속이나 산굽이에 동그마니 앉아 있는 오막 속에서 오 년이든지 십 년이든지 들어앉아 배워 온 소리를 혼자서 익히고 또 익혔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여자는 제 얼굴에 제가 반해서 바람이 나 떠도는 법이고, 소리꾼은 제 소리에 제가 반하여 평생 소리를 하며 떠돌게 된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들은 그 까닭으로 그랬을까.

시시포스는 어찌하여 바위 굴려 올리기를 쉬지 않고 있으며, 프로메테우스는 또 어찌하여 독수리에게 살점을 뜯기고 있으며, 아들 일곱, 딸 일곱을 모두 잃은 니오베는 어찌하여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나르시스는 왜 그렇게 신냇물을 한없이 들여다보고 있으며, 이 세상의 수많은 시인들과 소설가들은 어찌하여 끊임없이 자기 글을 그렇게 쓰고들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의 수많은 박테리아나 곰팡이들은 어찌하여 죽어 넘어진 산 것들을 썩어 문들어져 없어지게 하여 왔으며, 구더기들은 또 어찌하여 죽은 고양이의 시체, 쥐의 시체 물을 파먹어 없애 왔을까. 푸른 풀들은 어찌하여 땅에 뿌리를 박은 채 줄기로 물기를 빨아 올려서 세상을 푸르름으로 덮어 오고 있으며, 바람은 어찌하여 들풀에 꽃가루를 날려 주고 구름을 몰아다가 비를 뿌려 주는가.

나는 결국 그 까닭들을 알아내지 못했고, 내가 왜 글을 쓰는가 하는 대답도 해내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잡지를 만드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 아닌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에, 농부, 무당, 의사, 목사, 고양이……그들에게 왜 뽕을 먹고 왜 농사를 짓고, 왜 굿을 하고, 왜 병을 고치고, 왜 설교를 하고, 왜 쥐를 잡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할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만 대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