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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청어의 꿈 / 서 숙

청어의 꿈 / 서 숙

 

 

 

청어, 인체가 지니지 못한 푸른색을 듬뿍 가졌다.

푸른 물고기 떼, 청정물결 깊은 바다 군무는 꿈결처럼 현악의 선율로 흐느낀다. 뽀그르르 공기방울 흩뿌리며 모여들다 흩어지는 유연한 춤사위는 무수한 곡선의 향연이다. 가는 듯 오며 오는 듯 가는데 멈출 듯 휘돌아 어지러운 듯 일사불란하여 자유자재의 극치이다. 가느다란 유선형의 몸피 속 투명한 유지는 부드럽게 흐르건만 가냘픈 몸 안쪽 억세지도 날카롭지도 않은 촘촘한 가시가 가지런하다. 그 이름 헤링본은 섬세한 무늬결과 폭신한 촉감을 자랑하는 양모의 따스한 문양이다.

청어는 북태평양 검푸른 심해에서 차가운 수온을 즐기며 깊은 수심을 가르며 유영한다. 그 모습에는 고독한 평화와 망망한 자유가 스친다. 적막과 적요, 그러다가 겨울이면 동해를 찾아와 비로소 푸른 하늘을 본다. 암초들이 많은 연안으로 떼 지어 올려와 무성한 해조류에 산란하며 사랑을 품는다. 봄이 지나면 다시 북으로 북으로 간다.

숭고한 진리의 청색은 등에서 짙푸르고, 무구한 순결의 은백색은 가슴에서 희디희다. 심해에서 차가운 지혜를 길었으니 푸른 등은 진리의 각인이고, 공중에서 뜨거운 사랑을 섬겼으니 하얀 가슴은 사랑의 문신이다. 유유히 활주하던 자유와 평화의 꿈, 멀리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나던 자취, 지심한 바다에서 수면으로 올라 드넓은 하늘로 솟구치던 비약, 우주를 품었다.

이러한 청어의 미덕은 낱낱이 인류에게 공헌한다. 소금에 간간하게 엇졀여 연기에 그을리면 훈제청어, 찬 바닷바람에 꾸덕꾸덕 말리면 과메기가 된다. 북에서 남으로 긴 여정 번갈아 오가며 축적한 다양한 삶의 무늬가 담긴 풍부한 향유는 그 중에도 각별하다. 오제가3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두뇌에 필수영양소를 제공한다. 그리고 희고 둥근 비누의 몸을 받아 향기를 얻어 거품으로 세상에 녹아서 자신을 살아낸다. 청어의 꿈이 오랜 염원의 노래에 어린다.

최고의 비누는 가장 좋은 유지와 가장 좋은 물에 향기를 더하여 완성된다. 물과 기름은 원래 섞이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비누 속 계면활성제는 이질적 존재들의 팽팽하게 긴장한 표면장력을 줄여 서로를 섞게 해준다. 혀끝에서 달콤하게 부서지는 아이스크림에서, 여인의 피부에 고요히 스며드는 화장품에서 물과 기름은 은근한 조화를 이룬다. 모든 섞일 수 없는 것들이 경계를 부수고 드디어 스며드니 정화되고 승화하여 순결한 모습을 이룬다. 오묘한 조화의 한가운데 초월의 경지를 재현한다. 그래서 아이스크림과 화장품과 비누는 모두 우윳빛 흰색이다.

승화에의 염원, 우리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지 아니한가.

비누는 세상의 때를 보듬어 제 몸을 섞어 상대를 녹인다. 불순한 흔적은 슬픈 운명의 탕아로 자라나 온갖 얼룩진 자취를 묻힌 채 이리저리 헤매면서 굴린 멍 자국이 가실 길이 없다. 비누는 청정수에 잠겨 기꺼이 그 상처를 감싼다. 바다에서 품은 사랑을 펼치고자 눈물 아롱아롱 아프게 몸을 부순다. 가장 순수한 것이 가장 누추한 것을 받들어 출렁임의 풍성한 거품에 싸여 상대를 이끌어 한 몸이 된다. 향기로운 비누나 먼지 얹은 속진이나 원래는 같은 존재로 다 같은 물과 기름이다. 때의 물기와 기름기를 비누의 물기와 기름기가 만났으니 다른 모습 속에 동질성을 감추고 있다. 금강석으로만 금강석을 자를 수 있듯이 기름으로만 기름을 녹일 수 있다. 지혜와 온화함으로 거칠음을 이기고 겸손과 희생으로 완고함을 걷어낸다. 꿈은 대양이 되어 그러한 화합의 열의에 동참한다.

헌신에의 기대, 우리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지 아니한가.

기쁘게 그대 안으리. 일념으로 열중할 때 비눗방울 속 가득 찬 공기가 사랑의 무지개를 낳던 갈망은 드디어 절정에서 터진다. 황홀한 세계가 열린다. 흘러가며 사라지는 존재, 허물어지며 쌓는 온축, 허공 속에 자리 잡는 충만함 가운데 무화의 발걸음이 가볍다. 소멸의 아름다움이 찬란하다. 온전한 합일이다. 마지막 한 방울이 터지고 말면 축제의 끝, 드디어 나른한 평화가 향내로 남는다.

합일에의 갈망, 우리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지 아니한가.

비누거품을 내는 것은 꿈을 되새기는 일, 비누는 본연의 임무에서 오래도록 멀리 있으면 안 된다. 물기를 잃으면 저절로 말라 균열이 생기고 거품도 제대로 일지 않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사라지는 법, 쓰지 않으면 굳어버리는 터, 그러니 굳어 균열이 가지 않도록 아끼지 말고 거품을 즐길 일이다. 닳고 닳아 셀로판지처럼 얇아질 때까지. 그리하여 자취를 버리고 혼연일체되어 사라질 때까지, 기꺼이 소진시키리라. 스스로의 형체를 부정하며 자기 몸을 버려 세상을 구원한다. 마침내 찾아낸, 마침내 찾아온 사랑.

아낌없는 소진, 우리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지 아니한가.

비눗방울 흐르고 흘러 청어의 꿈, 다시 푸른 바다에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