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메랑 / 노경애
봄꽃이 튀밥 튀듯 하는 공원은 열댓 살쯤 되 보이는 아이들이 부메랑을 던지며 놀고 있다. 바짓가랑이가 땅바닥에 끌리는 줄도 모르고 놀이를 하느라 분주하다.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얼굴이 땟국에 절어있던 어릴 때 우리아이들 모습 같다. 아이들이 힘껏 던진 부메랑이 다시 되돌아 올 때마다 신기한지 연신 까르르 웃으며 손뼉을 친다. 한 아이가 부메랑을 집어 들고 투수처럼 팔을 휘두르며 멋지게 폼을 잡더니 좀 전에 제일 멀리 던져 기세등등해진 옆 친구를 힐긋 노려보고 입술을 질근 깨문다. 다부진 표정으로 보아 이번에는 친구를 이기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다. 천진난만한 저 아이들이 멀리 던지면 던질수록 더 큰 반동으로 돌아오는 부메랑이 곧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쓰레기장으로 날아간 삶의 부메랑은 쓰레기 냄새를 맡고 와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꽃밭으로 날아간 부메랑은 찐한 향기를 맡고 와 꿀 같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게 할 것이다.
막내가 일 년 동안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외식을 하고 산책을 한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싱그러운 솔내음과 참꽃향기가 봄 햇살에 살포시 퍼진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자연의 향기인가. 해마다 어김없이 봄은 찾아오건만, 일상에 부대껴 봄꽃구경 한번 가지 못하고 봄을 떠나보냈다. 정작 아이들 어렸을 때는 주말이면 도시락을 싸서 가까운 산이나 놀이공원으로 나들이를 가곤 했지만,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직장과 학교로 흩어져 얼굴마주하기가 세월의 더께를 얹을수록 더 힘들다. 그런데 오늘은 막내덕분에 가족이 모두 모여 그동안의 쌓인 회포를 풀며 공원을 거닐었다.
산책로는 노란 산수유 꽃과 개나리꽃이 먼저 피겠노라고 아우성이다. 보송보송한 털에 둘러싸인 막 꽃망울을 터트린 흰 목련도 겨우내 못 다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직지천을 따라 흐르는 도랑물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요란하게 니나노 장단을 쳤고, 암벽사이로 끓임 없이 물을 토해내는 폭포도 사람들의 환호에 너럭바위에다 제 몸을 부딪치며 화답을 한다.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벤치에 앉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분수도 바라보고, 아치형 나무다리도 걸어보지만 마음이 자꾸만 초조해진다. 저만치서 등짝이 넙적한 혈기왕성한 두 아들과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남편의 등이 오늘따라 따습고 힘 있어 보인다. 남편은 깍지 낀 막내의 손을 놓아 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걸까.
큰아이도 얼마 전에 직장을 따라 떠나갔다. 어스름이 깔리면 현관문을 열고‘엄마’하고 불쑥 들어 올 것만 같아 아직도 눈에 선한데 또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마음은 겨울처럼 스산하다. 큰아이는 보고 싶으면 한밤중이라도 달려가면 되지만 일본은 가까운 곳이기는 하나 절차를 밟아야 되니 바쁜 일상으로 엄두를 못 낸다. 문화와 사회적 관습이 다르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바다건너 낯선 곳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갈까. 해외를 이웃 나들듯 하는 요즘 세월이지만 출국 날이 가까워질수록 화롯가에 엿 놓아 둔 것처럼 마음이 불안하다. 숙소는 학교 기숙사가 있으니 걱정이 없는데 공부하랴 삼시세끼 때 챙겨 먹으랴 또 문뜩문뜩 밀려오는 외로운 마음을 어떻게 떨쳐버릴까.
"아이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주기보다는 잡는 법을 가르친다."는 유태인의 속담처럼 나는 그동안 막내에게 틈나는 데로 기본예절과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왔다. 요리를 할 때 이것저것 재료를 섞어 맛을 내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도마에 부딪히는 어설픈 칼질소리만 들어도 곧 손을 내리 칠 것만 같아 가슴이 벌렁대었다. 키는 멀대같아도 아직 시근이 들지 않은 이십대 초반의 피 끓는 청춘이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달군 철판위에 콩 튀듯 하는 급한 성미가 걱정이 앞선다. 학교 다닐 때 큰아이처럼 자취라도 시킬걸, 때 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데 막내가 아들을 마마보이로 만들 작정이냐며 헛걱정 그만 하라며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러면서 이다음에 취직하면 돈 많이 벌어 이층 집짓고 다리 아픈 어머니는 아래층에 살고, 저는 이층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자며 새끼손가락 걸고 손도장을 찍었을 때는 그 소리가 대견스러워 몇 번이고 되묻곤 했다.
예전에는 나도 막내처럼 자식걱정에 노심초사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잔소리로 생각하고 귀담아 듣지 않았다. 여러 자식 키우느라 진이 다 빠진 지지껍데기 같이 야윈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용상에라도 앉혀 놓고 떠받들 것처럼 잘 모시겠다고 마음속 다짐을 해 왔었다. 그런 딸의 마음을 헤아린 어머니께서는 그 말이 지키지 못할 부질없는 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눈길은 따스한 봄빛 같았다. 그동안 삶에 떠밀린 어머니를 향한 마음속 다짐들은 지금 어디에서 부유하고 있을까.
어느 새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 내 모습은 귀밑머리 백설이 내린 그때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던가, 이제 곧 울타리를 떠나 홀씨처럼 낯선 곳에 저 혼자 떨어질 막내는 그곳에서 무엇을 담아올까, 그 싹이 온전히 자라 싹을 틔워 풍성한 열매를 맺어 돌아오기를 어머니처럼 빌어본다. 봄꽃도 온갖 시련을 견디며 추운 겨울을 극복하고서 아름다운 꽃을 내 놓지 않던가. 저 봄꽃이 열매를 맺고 떨어져 거름이 되어 또 다시 꽃을 피우듯, 막내도 인생의 중심축이 될 그곳의 향기로운 문화를 흡수하고 세상을 보다 더 넓게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 환한 얼굴로 돌아 올 것이다.
공원을 내려오는데 가로수에 벚꽃들이 꽃비 되어 흘러내린다. 가족의 울타리를 박차고 떠날 막내를 위해 작별인사를 하는 것만 같다. 나는 앞서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어머니에게 무수히 했던 유년의 약속들이 부메랑이 되어 가슴을 저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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