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차회(茶會) / 이기창
창가에 비친 달빛이 한여름의 단잠을 깨웠다. 날이 밝았는가 싶어 일어났더니 아직 한 밤중이었다. 창 밖을 내다보니 둥근 달이 박꽃처럼 환하다. 차 한잔이 생각났지만 달밤의 고요를 깨고 싶지 않았다. 달을 벗 삼아 마음으로 차를 마시며 사유의 세계로 나래를 폈다.
지금부터 200여 년 전, 달빛이 은은한 가을날밤 초의선사(草衣禪師)께서 다산(茶山) 선생을 일지암(一枝庵)으로 초대하여 찻자리를 여는 모습이 보였다. 초의선사가 우려낸 차를 마시며 다산 선생이 다담(茶談)을 나눈다.
“차 맛이 참 좋습니다. 무슨 차인지요?” 초의선사가 대답한다.
“한식 전에 찻잎을 따서 만든 화전차(火前茶) 이옵니다.” 너무나 여린 차 잎으로 만들었기에 은은한 차향과 감미로운 차 맛을 음미 한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차를 마신 다산 선생이 찻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만지고 보기를 거듭한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다산 선생이 또 묻는다.
“이 다기는 어느 분의 작품입니까?”
“예, 조령(鳥嶺) 아래 고을의 이름난 도공의 작품을 어렵게 구했답니다.”
“그렇군요. 이토록 아름다운 찻잔에 귀한 차를 담아 마시니 선(禪)의 경지에 든듯합니다.” 초의선사가 합장하며 대답한다.
“칭송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래서 다선일여(茶禪一如), 도선불이(陶禪不二)라는 말이 있는가 합니다.”
사유의 바다를 유영(流泳)하는 사이 달빛은 더 밝아졌지만 불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다기가 보고 싶어서다. 찻상포(茶床布)를 걷으니 다기가 하얀 속 살을 드러낸다. 은은하지만 밝고 맑은 빛깔은 달빛을 닮았다. 수백 년 세월을 건너 왔건만 달밤의 고요와 달의 언어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청화백자(靑華白磁) 다기를 보니 도공의 모습이 떠오른다.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발로는 물레를 차고 손으로 질이라 부르는 흙덩이를 다루는 모습은 참선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전통 가마에 불을 지피는 도공의 흰 무명옷은 불빛에 반사되어 은은함을 더하는데 떨어지는 땀방울이 옷을 적신다. 불을 응시하는 눈빛은 구도자(求道者)의 염원을 담고 있다. 찻잔의 하얀 피부가 도공의 무명옷처럼 은근하고 그윽하다. 흰 옷을 즐겨 입은 조선시대 조상님의 순결(純潔)을 느끼게 하고, 꾸밈없고 투박한 모습은 태어날 때 이미 수백 년 나이를 먹은 듯한 고태미(古態美)를 보여 준다.
백자 다기와 통정(通情)을 하고 나니 정호(井戶) 찻사발이 눈길을 보낸다. 두 손으로 살며시 허리를 감싸 안으니 미인의 허리처럼 부드럽다. 굽깎기한 칼질의 흔적이 자연스러운데, 굽에는 동글동글한 구슬이 엉겨있어 매끄럽고 부드럽다. 배는 오름의 균형을 잡아준 물레 선의 촉감이 손바닥에 전해져 물레질 하는 도공의 기운 찬 율동이 느껴진다. 입술은 도톰하지만 투박하지는 않다. 입을 맞추니 감촉이 부드러운데 금방이라도 감미로운 찻물을 입안으로 흘려 줄 듯하다. 안 울을 보니 자연의 신비가 녹아 있다. 요변(妖變)의 흔적이 변화무쌍하다. 불 속에서 튄 재의 흔적이 은하수처럼 박혀있다. 빛깔은 달빛을 닮았는가 싶더니 적송(赤松)의 피부 같기도 하고, 적송이 타면서 일어나는 불꽃처럼 위치 따라 변한다. 무릉도원의 복숭아 빛깔에 가깝지만 그 보다는 훨씬 맑고 그윽하다. 흰 옷의 순결이 배어있고 대를 이은 도공의 전통이 혼으로 담겨있다.
도자기에는 작품을 만든 도공의 관지(款識)라고 하는 표식이 있는데, 내 찻사발에도 관지가 있다. 호(號)만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보니 오래 전의 작품인 듯하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원기 왕성했던 도공의 열정이 배어 있고 손때가 묻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은 시위를 떠난 화살 같다지만 선대 장인(匠人)이 살고 간 발자국은 전통 문화로 남는다. 전통 문화는 독창적이고 고유함에 그 가치가 있다고 한다. 한 가문의 투철한 장인 정신이 달빛처럼 은은하고 맑은 전통 문화로 이어져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있다. 그 전통을 누대(累代)에 걸쳐 이어가는 장인의 헌신적인 모습에 경외심마저 느낀다.
찻사발과 무언의 다담을 나누는 사이 중천의 달은 기울고 새벽이 희뿌연 모습으로 달려오고 있다. 즐겁기 그지없던 달빛 차회도 이제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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