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사에서 / 조하진
천태산(天台山) 영국사에서 내려오는 길 옆에는 삼단 폭포가 있다. 골이 깊지 않으니 웅장하지는 않지만 바위의 선이 부드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폭포수 바같쪽의 물줄기는 고드름이 되어 발을 엮은 듯하고, 그 안쪽으로는 물줄기가 쏟아져내린다. 고드름 뒤로 자신의 모습을 은근히 감추고 있는 겨울 폭포의 모습이 신비하다.
고드름이 햇빛에 반사되어 샹들리에의 수정 발처럼 반짝거린다. 잘생긴 고드름 하나를 만져보고 싶어진다. 몇 발짝만 내딛으면 손이 닿을 것 같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올라가 고드름을 잡는데, 그만 주르륵 미끄러져 아랫도리가 첨벙 물 속으로 빠져버린다. 길 위로 엉금엉금 기어나와 보니 깨진 얼음에 스친 손바닥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흐른다. 서둘러 손수건으로 지혈을 시켰다. 속옷도 멋어야 한다. 바침 행인이 없어 다행이다. 온몸이 떨리는 데다가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잘 벗겨지지도 않는다. 얼어붙으려는 물기를 수건으로 닦고 있는데, 중년의 보살 한 분이 외면을 하며 지나간다. 몇 년을 별러서 혼자 떠난 여행길. 마지막 날에 이런 낭패를 보다니…….
회사에서 일어나는 골치 아픈 일들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설 다음날 목적지도 정하지도 않고 훌쩍 집을 나선 것이었다. 대구 팔공산을 거쳐 김천 직지사와 영동의 양산팔경을 둘러보고, 마지막 여정으로 천태산 영국사를 찾아든 것이 어제 저녁이었다.
천태산 골짜기를 따라 절로 올라갈 때는 마치 내 고향에 온 것 같았다. 삽시간에 어두워진 산 속 마을의 두어 채 초가에서는 지붕 끝으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멀리 숲 속에서 간간이 산짐승 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에서 하룻밤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들엇으나, 절에서 자보는 것도 처음이려니와 재워줄지도 의문이다.
영국사는 법주사의 말사(末寺)이다. 절에 들어서니 보물로 지정된 삼층 석탑(三層石搭)과 원각국사비(圓覺國師碑) 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이 일어나 개경(開經)까지 위협을 당하게 되자 왕은 이 절로 몽진을 하였다고 한다. 절 맞은편에는 각아놓은 듯한 뾰족한 봉우리가 마치 팽이를 뒤집어 세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 왕비를 기거토록 하고 옥세를 맡긴 다음, 이원(伊院) 마니산성(摩尼山城) 에 근위병을 배치하여 적과 대치하게 하였다.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후 왕은 평군민안이 되었음을 부처님께 감사하고, 국청사(國淸寺)라는 절 이름을 영국사로 바꾸라며 현판까지 써주었다고 한다.
인기척이 나길래 주지스님을 찾으니 공양주가 법당으로 가 보라고 한다. 대웅전의 옆쪽 출입문을 살그머니 열고 얼굴을 들이밀자, 한 보살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눈짓으로 반기며 들어오라고 한다. 그 보살을 따라 부처님께 익숙지 않은 절을 여러 번 드리고 몇 장의 지전을 시주함에 넣고 자리에 앉았다. 부처님이 내 걱정을 알고 있으니 염려 말라는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저녁 예불에 끝난 뒤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하룻밤 유숙하고 싶다는 듯을 비쳤더니, 공부하는 학생 방이 있는데 마침 설 쇠러 가서 비어 있으니 잘 되었다고 한다.
정갈한 산나물 반찬으로 저녁 공양을 마친 후, 스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요즘의 복잡한 심사를 풀어보고 싶어서 한말씀 여쭈었다. “번잡한 생각에서 놓여나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겠는지요?” 스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고단 할 테니 일찍 자라고 하면서 방으로 안내를 한다. 그리고는 방에 불을 켜고 손으로 방바닥을 짚어보더니, 이만하면 춥지 않을 것이라며 합장을 하고 나간다. 스님의 친벌이 산 속의 추위를 녹여주었지만, 물음의 답을 구하지 못한 내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방은 적지만 깨끗이 치워져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선 채로 둘러보니 이 방 임자가 적어놓은 그 구절들이 벽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목표를 향한 각고의 어려움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그 방에서 한밤을 보내면서,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지난 생활의 과보(果報)는 아닌지 곰곰이 돌이켜보게도 된다.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산 속의 바람기는 매서웠지만 마음은 상쾌하였다. 더운 물을 주는 것을 사양하고 개울물로 세수를 했다. 물이 너무 차 머리는 감을 생각도 못하고 발만 씻으려 물에 담갔다가 얼른 빼냈다. 전 같으면 머리도 개운하게 감았을 텐데, 나이 탓으로 돌릴 수밖에―.
아침 공양을 잘 마친 뒤 하산하던 길에 예의 수정 발처럼 반짝거리는 고드름을 따려다가 생긴 일이었다. 깜짝 놀라는 스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옷이 마를 동안 스님 방에 따뜻한 아랫목에서 언 몸을 녹였다. 스님은 겸연쩍어하는 내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으신다. 문득 간밤의 질문이 생각나서 왜 대답을 한하셨냐고 물으니, 그런 생각을 갖는 자체가 욕심이라고 한다. 자연을 좇아 순리대로 사는 농사꾼은 그런 생각도 안 갖는 법이라는 말씀과 함께―.
스님이 계신 방 앞뜰에는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어젯밤 어두워서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이다. 육백 년도 더 되었다는 그 나무의 밑동에는 산짐승이 들어가 살아도 될만한 구멍이 뚫려 있고, 땅 위로 솟은 뿌리들이 둥치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뒤엉켜 있다. 어떤 가지의 끝은 마치 휘묻이를 한 것처럼 땅에 닿아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가을 금빛으로 찬란했을 무성한 잎들을 다 놓아버린 은행나무는. 이제 하늘과 맞닿아 있는 섬세한 가지들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긴 세월을 묵묵히 살고 있는 큰 고목(古木) 앞에서 외경심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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