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 노신
따뜻한 나라의 비는 예부터 얼음처럼 차갑고 굳어진 찬란한 눈꽃으로 변한 일이 없다. 박식한 사람들은 그것을 단조롭다고 느끼며 그 스스로도 불행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그렇지 아니한가? 강남 땅의 눈은 그러나 촉촉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것은 아직도 숨겨져 있는 한 봄의 소식이며, 극히 건강한 처녀의 피부와도 같다.
눈 덮힌 들 가운데는 새파란 구슬 같은 산차(山茶)와 흰 속에 푸른기가 도는 홑 꽃잎 매화와 꽃 모양이 구부러진 샛노란 매화가 있으며, 눈 밑에는 또 차갑고 파란 잡초들도 있다. 나비는 틀림없이 없었고, 꿀벌이 산차꽃과 매화꽃의 꿀을 따러 왔었는지 어쨌는지는 나로서는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 눈앞에는 흡사 겨울 꽃이 눈 온 들 가운데 피어 있고, 많은 꿀벌들이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이고, 또 그것들이 붕붕거리며 소리내고 있는 것이 들리는 듯하다.
아리즐은 얼어서 붉어진 생각(生角) 싹 같은 작은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여덟 명이 한데 모여 눈사람을 만들었엇다. 그들이 제대로 만들지 못하거나 하면 누구의 아버지건 나와서 도와주기 일쑤였다. 사람이 다 만들어지면 아이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비록 위쪽은 작고 아래쪽은 커다란 한 무더기에 지나지 않아서 결국 표주박인지 사람인지 모양을 분간할 수 없었지마는, 매우 깨끗하고 희고 대단히 밝고 고와서 눈 자체의 촉촉함, 아름다움과 함께 결합되어 전체가 번쩍번쩍 빛을 발하였다.
아이들은 용안(龍眼)의 씨를 가져다가 눈 사람의 눈알을 박아 주었고, 또 누구인가의 어머니의 화장품갑 속에서 훔쳐내온 연지를 입술 위에 발라 놓았었다. 그리하여 틀림없는 하나의 커다란 눈사람이 되었었다. 그는 곧 눈빛 을 번쩍거리며 입술을 빨갛게 해 가지고는 눈바닥 위에 앉아 있게 된다.
그 다음날이면 다시 몇 명의 아이들이 찾아와서 그를 보고 손뼉을 치기도 하고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웃고 떠들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홀로 앉아 있었다.
맑은 날 낮이 되면 또 그의 피부를 녹였다가 차가운 밤이 되면 또 그에게 한 층의 얼음을 입혀 주어 불투명한 수정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고, 맑은 날이 계속되면 또 그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알지 못할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입술 위의 연지도 완전히 퇴색하게 했다.
그러나 북쪽 지방의 눈꽃이 휘날린 뒤에는 그것은 영원히 가루와 같고 모래와 같아서, 그것은 절대로 엉겨붙지 않으면, 지붕 위나 당 위, 마른 풀 위에 뿌려져도 언제나 그러하다. 지붕 위의 눈이 먼저 녹아 버리게 되는 것은 집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불의 따뜻한 기운 때문이다.
다른 속의 것들은 맑은 날이라 하더라도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불어오면 곧 자욱히 날아올라서 햇빛 속에 찬란한 빛을 내며, 마치 불꽃을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처럼 맴돌면서 위로 솟아 하늘을 뒤덮어, 온 하늘이 맴돌면서 솟아오르는 듯이 빛나도록 만든다.
끝없는 넓은 들판에, 시리도록 차가운 하늘 아래 반짝거리면서 맴돌며 솟아오르고 있는 것은 바로 비의 정혼(情魂)이리라……
그렇다! 그것은 고독한 눈이며 죽어 버린 비의 정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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