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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눈 오시는 밤이면 / 오덕렬

눈 오시는 밤이면 / 오덕렬

 

 

 

자정이 가까워 일기를 쓰려다가 창문을 열었다. 저녁 때 설의(雪意)에 차 있던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눈은 가로등 불빛에 은빛으로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대지에 내리어 잠시 여수(旅愁)를 달래려는 하늘의 귀빈인 백설. 대체, 저 백설이 품은 속뜻은 어디에 있으며 무슨 조화로 온 세상을 한빛으로 만드는 것일까. 더없이 순결한 백설, 나는 잠시 그 세계에서 번뇌를 벗어난 어린애가 된다. 백설의 축복을 받는 한때이다. 

겨울엔 눈 내리는 날이 제격이요, 그중에도 함박눈이 내려야 겨울 맛이 풍성하다. 풍성한 겨울 맛을 찾다보니 초등학교 때의 등굣길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는 재를 넘어 학교에 다녔다. 간밤에 내린 눈이 등굣길을 덮어 버린 아침이면 신천지를 개척하는 탐험가의 용기를 지녀야 앞장을 설 수 있었다. 오솔길은 밤 내내 휘몰아쳐 쌓인 눈으로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산새 발자국 하나 나지 않았다. 책보자기를 허리춤에 질근 둘러매고 나는 언덕배기에 몇 길씩 몰아놓은 눈 속을 빠져나갔다. 이럴 때면 고무신은 벗겨져 간데없고 바짓가랑이 끝엔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겨울은 참으로 맵고 길었다. 세수한 어린 손이 문고리를 잡으면 짠닥 들어붙어 놀라지 않았던가. 으레 아침상에선 반찬 그릇이 미끄러지곤 했다. 밤이면 북풍에 문풍지 우엉 울고 배석자리는 뒷문에서 병풍이 되었다. 이런 겨울을 화롯불 하나로 녹이기는 힘이 겨울 수밖에…….

그러나 함박눈은 이 모든 것을 잘 감싸 준 겨울의 천사였다. 요새는 어디 그런 강추위와 강설(降雪)이 있기나 하는가. 오늘밤의 이 눈이 아니었다면 이 겨울도 싱겁게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함박눈이 수북수북 쌓이고 있으니 내일 아침 출근길이 즐거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빨간 머플러를 두른 멋쟁이 아가씨의 종종걸음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이 겨울이 얼마나 운치 있겠는가! 또, 내 앞에서 ‘엄마야!’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미끄러진 여인을 부축해 주면 얼마나 여유 있는 남성이 되겠는가. 다음 순간 내가 벌렁 넘어지면 아픈 엉덩이의 눈을 툭툭 털며 허허 웃고 일어설 것이다. 순전히 출근길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가 되어도 좋다. 주위를 의식하며 얼굴이 붉어오는 것으로 건강한 정상인임을 확인하는 기회도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한 구석에선 함박눈 내리는 밤에 어인 일로 괜한 심통이 이는지 모르겠다. 바람 불어 눈을 몰아붙이고, 기온 내려 한껏 겨울 맛을 내어 달라는 엉뚱한 바람이다. 교통이 좀 막히고, 학교가 좀 쉰다는 소동이 벌어지더라도 겨울다운 날씨가 한 이틀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어떻든 나는 내일, 아직 어둑어둑할 때에 아침 운동을 나갈 것이다. 밖에 나서면 몇 그루 앙상한 나목과 멋쩍게 어울린 도회의 표정 잃은 아파트가 살아 숨쉬는 동화 속의 저택으로 변한 설경이 꿈만 같을 것이다. 옆에는 피곤에 지친 채 한데서 잠이 든 차들이 눈에 덮여 하얄 것이다. 그러면 행선지가 바뀌어 지상에서 천상을 왕래하게 되리라.

“천국행”

눈 내리는 밤이면 나는 잠시 이 차의 승객이 된다. 연기 한 점 없이 초고속으로 하늘을 날을 것이다. 안테나로는 눈 덮인 남극 어디쯤에서 신나게 지절대는 펭귄들의 신비스런 얘기를 연해 수신하며 천국으로 가리라.

이러한 때면 함박눈은 할아버지의 허연 수염에도 생활의 흡족한 기운을 돌게 한다. 아파트 살림이 시작되면서 암만 가야 마당 한번 쓸 길 없던 할아버지는 눈을 쓸어 손자의 등굣길을 내주는 보람에 차리라. 빗자루를 통해 대지가 받은 하늘의 축복이 파문(波紋)처럼 전신에 퍼질 것이다. 모처럼 잔잔한 삶의 희열로 아침일이 힘 드는 줄 모르신다. 할아버지의 어젯밤 잠이 그리 달고 꿈이 좋았던 것은 정녕 함박눈의 혜택이었으리라.

함박눈이 내리면 도회의 거리엔 사랑이 넘친다. 외투 깃을 세운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눈 내리는 가로를 걷는다. 한없는 밀어들이 펑펑 내리는 함박눈처럼 끝없는 그들,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오뉴월 땡볕에선 정다운 대화가 오간다 해도 그것은 오히려 답답하기만 하다. 딱지맞을 즈음에 애걸하며 잡고 늘어지는 옹졸한 꼴이 되고 말 것이니까.

그러나 함박눈이 내리는 밤에는 중년의 아내가 살며시 팔을 끼며 다가와도 싫지 않다. 백설은 사랑을 활짝 꽃피우는 마법을 가졌나 보다. 여인들이시여, 눈 오시는 밤에 사랑하는 이와 거리에 나서시오. 그러면 세월에 묻어버린 젊음을 되찾을 것이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백설의 조화가 빚은 분위기 때문이리라.

눈 내리는 밤이면 마음의 고향 길에 오른다. 한지로 도배한 고향집의 아랫목, 그 아늑한 온돌의 정에 끌린다.

“정(情), 그것으로 말미암아 삶이 다사롭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인생이 괴롭다.”

이런 구절을 떠올리고 있는데 방문 앞 토방에선 신발에 엉긴 눈을 툭툭 터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분명하다.

“어이, 눈 오시는데 앉아 있긴가?”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손잡고 마주한다. 밖에서는 눈 앉은 대나무가 휘어져 시집간 누나를 맞이할 터널을 만드는 밤이다. 밤의 정취에 끌려 나서니 나뭇가지에 눈꽃이 한 잎 또 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