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 조영희
물이 한껏 오른 나무에 돋아난 이파리가 더욱 푸르다. 지난밤에 봄비가 다녀가며 닦아 주고 간 모양이다. 마당에 내려서니 군데군데 물이 고여 발걸음이 조신해 진다. 대(竹) 빗자루로 고인 물을 쓸어 내 보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앉는다. 그러기를 몇 번, 장독대에 빗자루를 기대어 놓다가 무심결에 마당 기슭에 돋아난 연초록 싹이 눈에 띄었다. 제법 봉곳이 솟아나 있는 것으로 보아 어제도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무심코 지나쳤나 보다.
시멘트로 덮인 마당이라 의아했다. 마중 나와 인사하듯 손을 내밀어 찬찬히 본다. 쬐끄만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틈은 뚫는 것이 아니라 비집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러고 보면 풀은 빡빡한 세상에 간신히 틈을 비집고 올라온 아주 귀한 생명체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어쩌면 오랜 시간을 준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돌나물인가? 봄이면 어머니가 밭 언덕에서 돌나물을 뜯어 와 여기서 손질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쇠비름인가? 길가에 흔하게 보이는 풀이니 쇠비름일 거야 하다가 대청마루 아래로 눈길이 닿았다. 몇 해 전부터 댓돌 아래에 화분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꽤 늘어나 있었다. 작년 여름에 보았던 분꽃 봉선화 맨드라미 그리고 작은 토분에 소담하게 피어 있던 노랑 분홍 하양의 채송화가 천연색 수채화처럼 펼쳐졌다. 그래 맞아 채송화, 화분에 살던 채송화가 땅속으로 이민을 갔던 것이다. 쉽지 않았을 테다. 시멘트 바닥 아래서 틈을 엿보며 얼마나 기 stlrks을 기다렸을까 하는 생각에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 마당 곳곳에 고여 있던 빗물을 생각해 본다. 실오라기만한 틈만 있었더라면 몰리 고이지 않고 자연으로 쉽게 돌아갔을 테다. 한치의 틈도 없이 빗물을 움켜쥔 작은 옹당이로 인해 빗물은 두르고 둘러 제가 왔던 자리로 돌아가겠지. 틈을 보인다는 것, 틈을 내어 준다는 것이 허점인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있어 서로 소통할 수 있고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몇 해 전 여름 사인암(舍人岩)에 갔을 때다. 여름 휴가차 단양팔경을 둘러 보고 김홍도가 이백 년 전에 그렸지만 지금의 풍광과 흡사하다던 사인암을 아이들과 함께 보고 싶어서였다.
사인암 주변에는 피서객들로 붐볐다. 폭우가 쏟아진 뒤라 불어난 물로 일찌감치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인암이라 부리게 된 영유와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글귀 그리고 기묘한 암벽이 일품이지만 더욱 사로잡는 것은 바위 큼을 비집고 선 노송들이었다. 감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백 년 전의 그림에서 있던 소나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바위 틈새로 또 다른 어린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바위는 제 어깨를 비켜 줘 틈을 만들고 품어 줬을 테다. 바위의 아픔과 애솔의 끈질긴 생명력이 마치 산고를 치르는 어미와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생명이든 아픔 없이 덜로 태어나 그저 자라지 않는 모양이다. 강직한 바위마저 틈을 내어 주어 두루두루 보듬어 줄 줄 아는데 세상에는 한치의 틈도 없이 꼭꼭 닫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만 가는지 모르겠다.
시멘트 틈새로 물을 부어 준다. 물 호스로 줘도 될 테지만 혹여 어린 생명이 다칠세라 바가지에 퍼다 살포시 기울여 찬찬히 스며들게 주었다. 물은 금방 틈새로 스며들었다. 어쩌면 저 작은 틈을 따라가면 볕드는 날을 꿈꾸는 거대한 지하 정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 갱 속에서 실낱 같은 빛 줄기 하나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몇 시간을 견뎠다던 광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마치 지금 땅속에 생명의 새싹들이 움틀거리는 것만 같아 발가락이 슬며시 오므라졌다. 틈을 크게 벌여 줄까 아니면 시멘트를 깨어 볼까 궁리를 하다가 그렇게 디면 더 이상 틈이 아니고 아예 틈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때 어머니가 다가왔다. 어머니에게 채송화 이야기를 했다. 채송화가 그곳에서 자란 지가 몇 해 전부터라는 말에 놀랐다. 그 동안 친정에 자주 들렀는데 왜 못 보았을까 하고 넋두리를 했다.
“그거 눈여겨볼 틈이 어디 있겠노? 오면 이것저것 챙겨 가기 바쁘재.”
그랬다. 친정에 올 때마다 마당에서 서성거려 볼 틈도 없이 저녁에 왔다가 아침 일찍 떠나곤 했으니 마당가에 핀 꽃이 어떻게 자라는 지 알 턱이 없었다.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어렵사리 뿌리내린 꽃이 대견해 틈틈이 물을 주면서 가꿔 왔던 것이다. 무에 그리 바빴을꼬. 언제나 그렇지만 자연에서 세상살이를 배운다.
요즘 사람들은 섣불리 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가진 게 너무 많아서는 아닐 테다. 혹여 틈을 보이면 얕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일까? 빈틈없이 완벽한 사람보다는 틈을 내보이며 수더분하게 사는 사람이 살갑게 느껴지고 더 정겹다. 그 틈새로 사람 냄새를 폴폴 풍기며 사람들 속에서 사람 맛을 느끼며 살고 싶어지는 봄이다. 어느 틈엔가 먼 산에서 내려온 아카시아 향이 코 끝에 스친다.
마당 틈새에 움트는 채송화나 사인암 절벽에 자라는 소나무는 틈이 가져다 준 덤이다. 안으로 밖으로 틈을 내어 여유를 부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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