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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르네상스 사람 / 송영옥

르네상스 사람 / 송영옥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개화지였던 도시, 피렌체에 대하여 나는 한 아름다운 기억을 지니고 있다. 기억은 처음 그 도시를 방문했던 20년 전의 것이지만 그 후 몇 차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에도 처음과 똑같이 감동이 새롭고 신선하다. 사람과의 관계처럼 도시도 재회할 때에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다. 특히 피렌체의 아름다움은 첫 대면 때의 그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늦가을 바람 부는 날, 그 곳 하늘로 들어섰을 때 지는 해가 세례당과 대성당의 돔에 불을 붙여 놓고 있었다. 피렌체는 로마의 북서쪽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도시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개화지이다. 르네상스의 도시답게 피렌체는 무수히 많은 조각상들을 거느리고 환영하듯 나를 반겨 주었다. 조각상들은 저마다 개성과 특징을 지니고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눈부신 저녁노을을 받아 몸의 윤곽은 마치 살아 숨을 쉬는 것같이 움직였으며 빛의 방향에 따라 율동적으로 리듬을 만들어 갔다.

살아 숨쉬는 것은 비단 조각상뿐이 아니었다. 미술관을 비롯하여 무려 스물다섯 개나 되는 사원과 궁전에는 회화들로 가득했다. 매력적이고 산뜻하며 사랑스런 그림들, 비록 복원된 것들이라 하더라도 르네상스의 회화로서 제 빛을 발하며 빛나고 있었다. 나는 눈이 부시어 고개를 가늘 수 없었다. 그 황홀한 순간에 주체할 수 없는 가슴속 갈망이 내 영혼을 흔들었다. 천년 세월이 지나도록 불변하는 예술을 창조한 르네상스 사람들을 지금 내가 만나고 있다는 깨달음, 그 황홀함이란 내 감성이 그들의 영혼과 한꺼번에 조우하면서 일어난 격렬한 감응이었다. 나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수첩의 한 면을 열고 커다란 글씨로 ‘예술을 창조하는 기쁨과 명예를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도시에 발을 딛노라’ 라고 써넣었다.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 바치는 나의 찬사였다. 지금도 피렌체는 르네상스 사람들의 영혼으로 내 속에서 살고 있고 늦가을 바람 부는 도시의 하늘은 여전히 셀리의 시가 되어 나의 감성을 흔들어 놓는다. 셀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 는 피렌체의 하늘 아래서 태어난 것이다. 바람이 부는 아르노의 숲처럼 하프가 되고 비파가 된 시인의 노래를 당신도 지금 듣고 있지 않는가. “겨울 오면 봄이 멀지 않았다”는 노래를.

르네상스 사람들은 단순한 화가 조각가 시인이 아니었다. 시와 조각과 회화를 한 몸에 지니고 역사와 철학과 공학을 그 정신 속에 품었던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그래서 르네상스인으로 대표되는 미켈란젤로는 14행시를 읊으면서 성채 건설의 책임다로 활동하였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헬리콥터와 잠수함의 설계자이었으며 지옷토는 화필을 들고 성당 건축에 뛰어들었다. 화가 바자리도 작가이며 건축가이다.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과학과 예술의 모든 것으로부터 삼차원의 환상을 창조하려는 야심가들이었다. 그래서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전세계에 단 하나뿐인 예술품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지성과 감성의 통합을 이룬 자들이었다. 통합을 통하여 그들의 예술은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었고 작품들은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인이라는 말은 내가 피렌체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연상되는 어휘이다. 르네상스는 고전 고대를 통하여 꽃피어난 모든 예술과 학문의 부흥을 의미한다. 인류의 그 새로운 시대를 우리는 재생, 즉 이탈리아어로 ‘라나시타’ 라 불렀다. 어원은 ‘다시 산다’ 의 뜻을 가진 라틴어인 ‘레나스키’에서 온 말이다. 불어와 영어로 ‘르네상스’ 이다. 이 말에서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언어예술의 생명력에 관한 고뇌를 안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부끄러움이며 작가는 진정한 의미의 르네상스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주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나는 이 말 때문에 가슴 뛰는 도전을 받는다. 다시 산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산다는 뜻이다. 새로운 피조물은 삶에 대하여 ‘전문가다운’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심미감이 가장 잘 발달한 사람이어야 한다. 어쩌면 그가 진정한 의미의 르네상스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예술적 생명력이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난 사람에게서 방사되는 빛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피렌체는 원래 꽃의 도시라는 뜻이다. 봄이 되면 온통 도시 전체가 꽃 바다이다. 꽃향기는 여름이 가도 사라질 줄 모른다. 농부들도 꽃향기에 취한다. 꽃들이 피었던 초원으로부터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포도즙을 짠다. 아마도 올리브를 큰 독에 담을 때에 꽃향기에 취한 농부들은 비틀거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벽의 따스한 돔 색깔에 맞추어 아르노 강변의 나뭇잎에 단풍이 들면 꽃향기는 강의 계곡으로 흩어지고 하늘은 무거운 남색이 되고 가을이 깊어진다. 가을비에 들길은 강줄기가 된다. 이리하여 이탈리아에서 가장 나쁜 그러나 나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아르노의 계곡에 추위가 찾아온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 꽃향기 날리는 봄을 기다리는 아르노의 겨울은 너무나 아름답다. 기다림이 있기에 추위 속에서도 피렌체는 향기 나는 도시가 된다.

지금도 피렌체의 기억은 나의 의식을 깨어나게 만든다. 내 글의 주제가 삶에 그침 없이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삶에 깨어 있어라 그에게 열중하라. 예술적 감성으로 삶을 느끼며 과학적으로 삶을 연구하라. 나의 독자들에게 이처럼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창조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때문이다. 삶에 대한 심미감이 가장 잘 발달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일생이 ‘삶의 예술을 창조하는 기쁨과 명예를 위해서 살았다’ 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