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 이정연
소원해진 친구의 편지를 기다리다 못해 함지박을 꺼냈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라도 하며 잊어버리고 싶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의 유품을 닦노라면 가만히 내 잘못을 일러주실 것 같기도 하다. 두 분이 돌아가신 후, 비교적 덩치 큰 유품들은 다 태웠다. 제대로 보관하지도 못할 거면서 봉 때마다 당신들 생각에 눈물 흘릴 생각을 하니 차라리 한꺼번에 슬퍼지는 게 오히려 현명할 것 같기도 하였다. 그렇게 두 분의 손때 묻은 가재도구들은 다 없애고 바가지 모양의 재래식 다리미, 화롯불 쏘시게, 인두, 배틀의 북이나 바디 그리고 시계나 비녀, 반지 등이 남았다. 어느 하나 어머님의 눈물이나 애환이 스미지 않은 물건이 없지만 그 중에도 두 분의 반지는 당신들이 늘 몸에 지니시던 것이라 각별한 정이 으껴진다. 거내어 가만히 손에 껴 보면 그 다정하시던 손을 잡은 듯하다.
직장생활하고 나서 4년째인가 동네의 어머니 친구 한 분이 놀러 오셨는데, 어머니의 눈길이 은밀히 그분의 금가락지에 머무는 걸 보았다. 내색은 않으려 하셨지만 설핏 스치는 부러움이 몹시도 안쓰럽고 죄송했다. 월급날을 기다려 두 돈 반쯤 되는 중량의 금으로 대충 어림짐작한 크기의 반지를 만들어 드렸다. 웬 반지냐며서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빛이 없이 좋아하시는 걸 보니 그 동안 얼마나 갖고 싶으셨을까 싶어 또 한 번 가슴이 미어졌다. 그런데 어머니의 반지를 그렇게 끼워 드리고 나니 아버지의 성화가 불 같았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웬 반지냐시며 당장 도로 물리라고 다그치셨다. 워낙 불 같은 성미였기에 가만히 반지를 빼 두고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가 혹시나 싶어 “아버지도 반지 하나 해 드릴까요?” 했더니 화로에 놓인 곰방대를 치켜 들고 때리려는 시늉을 하시기에 얼른 일어나 피하면서 보았더니 그다지 나쁘기만 한 표정은 아니었다. 보통 우리를 혼낼 일이 있으면 작대기를 들고 당신이 지칠 때까지 따라오는 분이셨기에, 시늉만 하고 주저앉는 심리를 왜 모를까. 그 다음 달 월급으로 아버지 반지를 해 드리려고 금은방에 들렀는데 도무지 반지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 손이야 가끔 만져 보고 대충 짐작을 했지만 아버지의 앙상한 손은 도무지 굵기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제 엄지손가락만할 거예요.”라고 했더니, “남자 손은 보기와는 달리 손마디가 있어 넉넉하게 해야 한다.”며 친절하게도 말한 크기보다도 한 치수 큰 걸로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또 혼날까 봐 대구로 오는 길에 몰래 사랑방 윗목에 두고 왔었다. 그러고는 3주쯤 다니러 가지 못하다가 4주째 갔더니 그 반지를 끼고 계셨다. 그것도 그냥 끼고 계신 게 아니라 커서 헐렁한 반지를 손바닥 안쪽 보이지 않는 곳을 무명실로 찬찬히 감아, 당신 손에 맞춰 끼고 계셨다. 피식 웃음이 나오며, 그 동안 ‘시장하지 않다’ ‘고단하지 않다’ 등 얼마나 많은 말씀들을 곧이곧대로 믿었는지, 다시 한 번 우매함이 부끄러웠다.
반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두 분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선 어머니의 반지는, 반지에 새겨진 꽃무늬가 다 닳아 거의 알아볼 수 없이 되어 있다. 나가실 때만 끼시던 걸 ‘자주 끼셔야 본전 뽑는다, 딸이 해 드린 거 자랑이라도 해 주세요.’ 몇 마디 주문 끝에 마지못해 끼신 그 반지는 그 후 돌아가실 E대가지 모든 일을 어머니와 함께했다.
타작마당의 지푸라기 속을 헤집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 콩밭 매는 호미를 잡은 손에도 늘 함께하고 구정물 담긴 설거지통 속에도 담기며 고락을 나누었다. 반면 아버지의 반지는 가느다란 빗금이 그대로 남아 있음이 재미있다. 그 반지를 끼시던 무렵부터는 전혀 농사일을 손도 대지 못하셨던 까닭이다. 천수답 몇 마지기 벼농사마저 어머니께 맡기시고 종일 멀쩡한 담배를 까서 곰방대에 담아 피우곤 하셨다. 아마도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을 곰방대 빠는 노동이라도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하루 종일 담뱃불을 끄지 않으셨다. 그러니 반지는 자연 깨끗한 무늬가 그대로인 것이다. 부드러운 무명으로 살살 닦고 있으니 꿈결인 듯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반지를 제자리 함지박 속에 넣으며 내 반지를 보았다. 어머니 반지보다 아버지 반지 쪽에 가깝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고 또 밥은 전기밥솥이 알아서 해 주고 설거지마저 고무장갑을 끼고 하니 그런 것인가 하다가도 여지없이 게으른 내 탓인 것도 같아 슬그머니 죄송해진다.
반지의 무늬가 다 닳아 없어지도록 당신이 우리에게 베푼 사랑을 어찌 뒤늦은 지금에야 가슴 아파하는지……. 이런 날은 그냥 실컷 울어라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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