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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후불(後佛) 축의금 / 류영렬

후불(後佛) 축의금 / 류영렬

 

 

세상을 살다 보면 어이없는 실수나 또는 준비 안 된 상황 앞에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친구들과 어울려 한잔한 술값을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고 보니 지갑이 없을 때라든가, 우연히 길에서 만난 지인과 찻집에 들렀다 나오며 찻값을 내려고 보니 주머니가 비어 있음을 알았을 때가 그 한 예(例)일 것이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관광버스에 몸을 맡겼다. 자동차 엔진 시동 소리와 함께 승차한 사람에게도 슬슬 시동이 걸리는가 싶다. 자동차가 출발하자마자 혼주의 친척 몇 사람이 술병과 안줏감을 들고 하객들 의자를 한바퀴 돈다. 술이란 것이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다가도 한두 잔 마시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용기도 생기게 마련이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 가고 시간이 좀 지나니 많은 하객들이 도연(陶然)하다. 이즈음 버스 안 스피커에서는 소위 뽕짝 음악이 메들리로 악을 쓰듯 퉁겨져 나오고 있었다.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 본다……’

혼주 친구들 부인인 듯한 아줌마 몇 명이 버스 통로에 나와서 흔들흔들 음악에 섞여 몸을 비틀기 시작한다.

“뭐야 뭐야- 제발 날 내버려두지마…….”

의자에 앉아 있던 하객들이 하나 둘 거리낌없이 동참을 하는가 싶더니 버스 안은 금세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한다. 춤추는 아저씨, 아줌마의 팔다리가 유연성 있게 제각각 움직인다. 양팔이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는가 싶더니 천장을 찌르려는 듯하는가 하면, 퍼머머리를 한 아줌마의 머리는 농악대의 상모돌리기 하듯 한다. 엉덩이는 한결같이 오른쪽 왼쪽 물결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관광버스에서의 춤판은 가히 독창적 예술(?)이었다. 요즈음 흔히 젊은층에서 추는 유행 타는 춤도 아니요, 그렇다고 텔레비전 어느 오락프로에서도 볼 수 없는 시골 아주머니, 아저씨 특유의 관광버스용 춤이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마구 흔들어대는 것 같으면서도 뽕짝 음악에 조화를 이루는 춤이었는데, 이들의 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결같이 특이한 점이 발견되었다.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그토록 신명나게 흔들어대는 자세에서도 넘어지거나 의자에 부딪히지 않고 춤을 추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발목에 힘을 주고 신발은 자동차 통로 바닥에 찰싹 붙인 채, 상체인 팔과 허리, 머리를 제각기 마구 비틀고 흔들고 돌려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 곤혹스러워했으나 이내 이해하기로 했다. 30여 년 가까이 키운 딸을 시집보낸 혼주의 허전한 마음을 위로해 주려는 친척들과 이웃, 친지들의 마음씀이 도리어 의초롭다. 또한, 주부들이 가정에서 살림만 하다 모처럼의 나들이에서 신떨음이나 하도록 관망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요란한 춤판은 이따금 버스 안 스피커에서 갑자기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에 잠시 잠깐 멈추곤 할 때가 있었는데, 이 때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저만치 교통경찰이 보이고는 했었다.

 

인제에 살고 있는 사촌 처남이 딸을 시집보낸다는 일요일이다. 서울에서 예식을 치르는데 관광버스를 임차하였단다. 자택에서 6시에 출발, 중간지점에서 연락을 한 번 할 터이니 그때쯤 홍천 시외버스 터미널 앞으로 나오라는 새벽 전화를 받았다.

중간지점에서 전화를 한다던 처남이 홍천에 다 왔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허둥지둥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서 관광버스에 올랐다.

예식장으로 향하는 관광버스에는 새벽 일찍 집을 나선 탓인지 모두 조용히 가는 편이었다. 동승한 하객들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버스는 서울의 한 예식장에 출발한 지 두어 시긴 만에 도착을 했다.

예식장에 도착, 하객들 틈에 끼어 빨려들어 가듯 식장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축의금 접수대 앞에 멈추어 서게 되었다.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웬일인지 아무것도 손에 집히는 게 없었다. 이때서야 아차! 싶다. 새벽, 집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지갑을 빼놓은 채 집을 나선 것이다. 전날 밤 미리 써 놓은 축의금 봉투는 책상 위에 조용히 모셔 놓은 채 나온 것이 분명하다. 옛말에 “장가가는 놈이 그것 빼놓고 간다”더니…….

남세스러운 일이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이 꼭 지녀야 할 축의금을 빼놓고 올 줄이야. 동행한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 또한 별도로 갖고 온 지갑이 없단다. 황당할 뿐이다. 이마에서는 갑자기 진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집 근처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낭패를 당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태평 치고 있다가 처남의 전화를 받고서야 허겁지겁 집을 나오느라 꼼꼼히 챙기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궁여지책으로 혼주에게 축의금 낼 돈을 빌려 볼까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처럼 웃음거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함께 참석한 친척에게 지갑을 뻬놓고 왔으니 돈 좀 빌려 달라는 것도 창피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이렇게 멍청한 놈이다.’라는 광고를 하는 셈이 되니 말이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이 순간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것이 있었다. 축의금 접수대 옆에 비치해 놓은 빈 봉투 한 장을 덥석 집어 들고 조용히 예식장 한 쪽 귀퉁이로 가서 내 이름과 메모지 한 장을 써넣은 봉투를 접수대에 내밀고 말았다.

‘축 화혼 / 금 ○○○원 / 축의금 후불 / 내일 중 우체국 집배원이 혼주댁을 별도 방문할 것임 / 류영렬’

 

젊은 시절 실수라고는 모르는 꼼꼼한 사람이라는 평을 주변에서 듣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지, 갈 데까지 간 고물(?)인간이 되어 간다는 징조인지 모를 일이다.

오늘의 실수는 내게 반성의 거울이 될 것이다. 앞으로는 아무리 바쁜 일이라도 서두르지 않고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다.

귀가 길 춤판에 흔들리던 관광버스는 어느새 집 앞에 도착, 통로의 하객들을 꾸역꾸역 쏟아 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