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를 위한 나의 변주곡 / 김애자
지난 여름은 비가 잦았다. 청정하다 못해 적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불온해 보이기 조차한 칸나 잎이 사흘이 멀다고 내려꽂히는 빗줄기를 타고 춤사위를 펼쳤다. 빗줄기의 리듬에 따라 유연하게 율동하는 칸나의 싱그러운 잎을 보고서 정감을 품지 않을 이 어디 있으랴
그것이 좋아 울을 끼고 휘어 돌아가는 화단에는 칸나만 심는다. 수십 포기의 짙푸른 군단이 제복의 장병들처럼 도열한 모습이 좋고, 서리 내릴 때까지 파스텔 색조의 하늘을 이고 연이어 피어나는, 인주빛 타래가 좋은 것이다.
칸나는 목이 길다. 그의 조상도 파초처럼 남국 어딘가에서 왔을 터. 모국이 그리워 수사슴처럼 관을 높이는가 모르겠다.
칸나는 강인하다. 어디에 심어도 도무지 낯가림을 타지 않는다. 낯가림만 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간한 가뭄이나 장마에도 잎만 두어 군데 찢기면 그만이다. 울안의 화초들은 가뭄을 견디지 못해 널브러지고, 장마 때면 뿌리가 물을 켜 맥을 못추건만, 녀석은 언제 가뭄이 있었고, 비가 오고 태풍이 불었냐는 듯 기세가 자못 당당하다.
나는 고향에 와서도 텃새를 받아 몇 번이나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고향에 대한 나의 믿음을 배신하는 것은 귀향이 너무 늦은 탓이다. 이미 오래 전에 떠났던 사람은 날아온 돌이나 다름없다는 토착민들의 야박한 인식도 그러하거니와, 어디를 둘러봐도 내 기억의 파일에 저장되었던 것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그리던 사람들도 거지반 떠나고, 낯선 사람들이 낯선 모습으로 살고 있다.
때문에 고향에 와서도 고향이 그리운 것이다. 목마름을 느끼는 날에는 산골 간이역으로 달려가곤 한다. 기적을 울리며 산굽이를 돌아 들어오는 기차를 보고 있으면 이번에는 떠나야 할 목적지가 없고, 찾아가 만나야 할 사람이 없다는 또 다른 단절이 나를 슬프게 한다.
칸나는 도무지 쓸쓸하다거나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척박한 땅에 심겨져도 어디에서 어떻게 영양분을 걸터먹는지 튼실하게 몸 간수를 잘한다. 고난의 밑바닥을 치지 않고서 어찌 이역의 땅에서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겠냐는 듯이.
그리곤 작열하는 태양을 향해 꽃대를 길어올린다. 칸나의 힘은 뿌리에 있다. 나는 봄이면 다락에서 뿌리를 보관한 마대 자루를 끌어내려 한 쪽씩 떼여 낸다. 흡사 남근을 닮았다. 튼실한 것으로만 가려서 휘어 돌아나간 화단을 따라가며 공들여 묻는다. 겨우내 침묵하던 대지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면 흙은 꿈결인 듯 고것들은 품안에 받아 20여 일간 힘을 비축시켰다가 싹을 티우게 한다. 어미는 열심히 새끼들이 불어나도록 진액을 빼고, 불어나는 새끼들은 한데 엉겨붙는다. 절대로 떨어져선 안된 다는, 단단한 결속력이 가뭄과 장마를 견디어 내게 한다. 땅이 갈라질 정도로 힘의 굳건함을 밖으로 들어 낼 때의 뿌리는 짙은 자색이다.
하지만 여기는 남국이 아니다. 어느 날 북풍이 발을 구르다 그예 검을 빼어 든다. 밤새 번쩍이는 서슬에 칸나의 기세가 땅에 떨어진다. 서릿바람에 얼마나 태질을 당했으면 온 몸이 녹슨 청동 빛일까.
그 앞에 서면 목이 메인다. 하와이에 정착한 한국인 1세들이 생각나서다. 눈만 뜨면 사탕수수 밭으로 내몰려 노예처럼 살다가 그 땅에 뼈를 묻음으로 오늘 날 아메리칸 제국에 코리아타운을 세울 수 있었고, 칸나처럼 당당하게 위세를 갖추고 살고 있게 되었다. 고난의 밑바닥을 치고 일어나 피운 영광의 꽃이여.
올해도 서릿바람이 몰아치면 나는 청동빛으로 널부러진 칸나를 베어 내고 괭이로 뿌리 언저리를 깊게 파헤칠 것이다. 그러면 엉겨붙은 결속의 중심에서 검게 속이 빈, 더 이상 생성의 기능을 상실한 거룩한 죽음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검은 껍데기를 떼어 땅에 묻고, 그의 후예들을 마대자루에 거두었다가 햇살이 조바심치는 어느 봄날 다시 그 자리에 심어 놓고, 장마가 지면 더러는 술잔을 눈썹 아래까지 들어 올리고 칸나 잎을 두드리는 빗물의 변주곡에 귀를 모을 것이다. 그리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의 길을. 길다운 길을 생각하며 술잔을 비울 것이다.
오늘은 인주빛 꽃대 위로 가을 하늘이 너무도 푸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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