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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초인 연습 / 강기석

초인 연습 / 강기석

 

 

 

 

산에 가야 한다. 절망이 녹물처럼 흘러내리면 산에 가야 한다. 장마 한고비에 비 그치기만 기다릴 수 없다. 빗줄기가 잦아진 틈을 타서 서둘러 집을 나선다. 산은 산에서 내 절망을 기다리고 있다.

어젯밤 꿈에 송장을 지고 진회색 조립식 성당을 서성거리던 초로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성당 벽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의 흔적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낡은 그림자를 뒤적거리던 남자는 혼자 희죽거리다가 산을 향해 웃었다. 송장의 눈에는 세상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도로와 맞닿은 풀숲에는 탯줄 같이 좁은 길이 장마에 너덜거린다. 나는 젖은 신발을 끌어 굴참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숲은 나무 젖는 소리로 나를 맞이한다. 가까운 데 나무 젖는 소리가 나고, 먼 데 나무 젖는 소리가 난다. 산은 나무 젖는 소리로 더욱 고요하고 내 절망은 혼자 외롭다.

가빠진 숨을 고르면서 칡덩굴이 소나무의 멱을 노리고 있는 언덕길을 오른다. 소나무는 칡덩굴의 부드러운 미감이 자신의 푸른 삶을 붉게 산화시킨다는 것을 모른다. 슬금슬금 감겨오고 죄어오는 감미로운 유혹을 차라리 연모한다. 내 절망도 칡덩굴의 유혹처럼 달콤하고 사악할지도 모른다.

절망이 내게 말한다. 절망하는 일은 불행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절망은 삶의 의지일 뿐 굴종이 아니라고 말한다. 절망하는 사람은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며 창조를 고뇌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모롱이를 돌아서니 빗줄기가 굵어진다. 강풍에 쓰러진 나무들이 데군데 주검처럼 누워 처연히 비를 맞고 있다. 아무도 그들을 세우려 하지 않고 그들 역시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 녹색 이끼가 부패하는의 홈을 따라 기도처럼 번지고 있을 뿐이다. 삶과 죽음의 무한한 간극을 내 절망이 메우고 있다.

길은 계곡을 따라 계속된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내려왔다가 또 올라간다. 지루한 길섶 저 편에 참나리 한 송이가 초연하다. 다가가 그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후줄근한 장마 속이라 더욱 순결하고 녹색과 대비되어 더욱 존엄하다. 나는 여전히 산나리처럼 붉고 싶다. 초월과 자유를 열망하며 붉게 절망하고 싶다.

곡이 높아질수록 물은 더욱 투명하다.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돌벼랑을 지나온 물줄기는 여울에서 금방 평상심으로 돌아와 한없이 여유롭다. 한 올 구김도 없고 한 가닥 흐트러짐도 없는 절대 무심이다. 하늘도 거기 머물지 못하고, 산도 거기 머물지 못하고, 나도 거기 머물지한다. 나는 텅 빈 물 속에서 초로의 남자가 더듬거리던 기호의 의미를 찾는다.

산으로 올라간 초로의 남자가 잡초가 덥수룩한 무덤 앞에 불쑥 나타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더니 시커멓게 말라 죽은 느티나무에 송장을 걸쳐 놓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자유로운 하늘로 올라가려 했다. 나의 영혼은 별나라를 갈망했다. 나는 창조를 위해 몰락을 갈망했다. 자유의 번개를 그리다가 끝내 절망하고았다. 절망의 무덤이여! 나에게 부활을 가져다오. 뼈와 살이 부패하여 썩은 냄새가 나기 전에 나를 불러 생명을 다오. 아침 햇살과 같은 용기를 다오’

건넛산에서 안개가 오른다. 안개는 온갖 형상을 만들면서 산을 희롱한다. 내 절망은 어쩌면 허영인지도 모른다. 절망의 카타르시스로 삶을 연명하려는 또 다른 존재 양식인지도 모른다. 혼란이 머릿속에서 오래 지속된다.

은 좁아져서 희미해지고 나무 가지를 엮고 뿌리를 얽어 만든간은 칙칙하다. 빗물은 아랫도리가 벌겋게 드러난 소나무 뿌리 사이를 쉼 없이 드나들다가 오리나무 이파리 위를 하얗게 지나간다. 질펀한 풀숲을 지그시 밟으니 물이 신을 넘어 발을 적신다. 서늘한 기운이 발목을 지나 종아리를 거쳐 허벅지를 타고 등을 기어올라 목 줄기를 따라 머리끝에 닿는다.

빗물에 패인 길을 한참 오르니 소나무 숲 사이에 공터가 보인다. 붉은 소나무 줄기들의 옹골찬 용트림을 따라 하늘이 내려와 앉아있다. 숲은 하늘을 지향하는 경배 의식으로 충만하다. 나는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깊고 긴 호흡에 빠진다.

숨을 길게 내쉬니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추악한 제단을 쌓던 욕망이 숲의 복음에 굴복하여 좁은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다. 허영의 그림자가 가소롭다. 절망의 사치가 매스껍다. 초로의 남자는 송장 앞에서 구토를 시작했다. 구토물이 떨어진 송장에서 털이 숭숭 돋은 흉측한 애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온 산을 뒤덮었다. 나는 몸서리를 치면서 잠을 깼다.

기에서 한 줄기 엷은 바람이 일어난다. 나는 코와 귀를 활짝 열어 허기진 영혼을 채운다.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살 냄새 같기도 하고, 내 이전의 내가 존재했던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전하는 원형의 언어 같기도 하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각질을 벗겨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사각사각 어둠이 잘려 나가는 소리 같기도 하다. 가늘어진 빗줄기가 멎는다.

상으로 올라가는 암벽은 가파르고 길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일이 쉽지 않다. 허공으로 추락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숨이 차오르고 현기증이 난다. 눈이 초점을 잃어 하늘을 한 바퀴 빙글 도는 데, 날개 짓이 서툰 하얀 나비가 어른거린다. 한 마리가 두 마리가 되고 두 마리가 수 천 수 만 마리가 되더니 다시 한 마리로 돌아온다. 날개 빛이 찬란한 금방 우화한 나비이다.

후미진 곳에서 처절하고 고독하게 몸부림쳤으리라. 나무젖는 소리에 외로워하고, 녹색 이끼의 기도를 두려워하며 어둡고 긴 기다림을 감내했으리라. 칡덩굴의 유혹에 허우적거리면서 참나리의 꿈을 잃지 않았으리라. 애벌레의 굴욕과 번데기의 적막을 인종하면서 날개를 꿈꾸었으리라. 마침내 보았을 파란 번개의 희열을 떨리는 몸으로 맞이했으리라. 나는 나비의 비행을 따라 산을 오른다.

함지산 꼭대기에 도달한 나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장마가 짙게 남아있는 검붉은 석양 속으로 날아간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나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 나비가 날아간 하늘을 바라본다. 초로의 남자가 더듬거리던 암호의 의미가 희미하게 현상된다.

‘인간도 날 수 있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그래, 신이 아닌 인간도 날 수 있다. 절망은 날개를 위한 노래이다. 나는 날기 위해 내일도 오늘처럼 절망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산을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