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 조성원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것이 옷이다. 때에 맞추어 옷을 꺼내 입는다. 당연 집안에는 옷들이 수북하다. 내 옷만이 아니니 그야말로 집안을 제일 많이 차지하는 것이 옷이 아니겠는가 싶다. 하지만 나는 그 많은 옷들의 정확한 출처를 모른다. 어디에 겨울옷이 있고 잠바가 처박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뿐 만이 아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월요일이면 분주한 것이 옷 때문이다. 출처를 모르고 무엇을 입어야 할지 모르니 당연 순서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내는 옷에 대해서는 도가 튼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옷을 하나하나 꺼내어 내어주는 것이 그쯤이면 스스로 질리고 짜증도 날 것인데 아내는 전혀 그러한 기색이 없다. 아무리 바빠도 아내는 꼭 옷을 챙겨 주려 한다. 여자란 참 이상한 존재란 생각을 나는 그때 한다. 간혹 내 마음 내키는 대로 꺼내 입은 적이 있기는 있다. 그런 때는 꼭 한소리를 듣는다. 이제는 숫제 단념하고 주는 대로 공손히 옷을 입는 것이 편하고 습성화되었다. 나는 옷을 입을 의무만 있고 아내는 옷을 골라주는 권리가 있는 셈이다. 나는 여직 옷에 있어서는 자수성가를 하지 못했다.
엄마가 어릴 적 늘 옷을 챙겨주더니만 결혼해서는 아내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엄마와 아내는 묘하게도 공통점이 있다. 참 묘한 옷의 선택이다. 다 커서 엄마가 내게 늘 주문한 것은 양복이었다. 결혼하고서 본가에 올 때 양복을 입지 않으면 엄마에게 잔소리를 꽤 들었다. 내가 혼나는 것이 아니고 아내가 대신으로 혼이 났다. 반듯하게 보여야 한다는 엄마의 의중이 당연 담겨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나이 들어서 내게 강요하는 것이 또 양복이다. 이제는 반듯함이라기 보단 궁색하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그런 것만 같다.
분명 양복은 위엄을 갖추어 반듯하고 세련되어 산뜻하게 보이는 차분한 무엇이 있다. 허우대가 나같이 시원찮아도 카버가 되고 오히려 달리 보이게 하는 묘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양복이 이 나라에 처음 들어 온 것은 1881년 정부의 신사유람의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된 개혁파 정객, 김옥균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 양복을 사 입고 돌아온 것이라 한다. 당시 그들에 대해 물의를 일으켰다고 하였으니 양복은 불과 백여 년 만에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대성공을 하였다. 요즘은 일상복과도 같이 되어 양복을 입고란 말로 쉽게 쓰지만 예전 글들을 살펴보면 양복은 차려 입고란 말로서 정중하게 표현하였다.
이는 양복에 대한 각별한 예우로서 격식에 맞게 갖추어 입는다 하는 의미를 지니도록 한 것이 아닐까. 서양서 들어와 꽤 호강하는 존재가 바로 양복이다. 그러기에 양복은 함부로 다루어선 안되고 구겨져서는 제 멋을 잃는다. 솔직히 양복 한 벌 해 입는 다는 것이 어디 흔한 것이던가. 지금도 양복 값이 엄청나지만 그때의 맞춤 양복은 그야말로 대단하였다. 평생 양복 한 벌 입어 보지 못한 사람이 꽤 많았으며 한 평생 양복 한 벌로 살았다는 지체 높은 분들도 흔하였다 . 검소해서도 그렇겠지만 그만큼 값진 옷이 양복이었다. 그래서인지 한 벌 장만하는 양복은 때가 덜 타고 다용으로 활용이 가능한 거의 검정이거나 곤 색을 많이 택하였다. 나는 결혼 예복으로 양복 맞춤옷을 딱 한 번 해 입었었다.
당시 안양에서는 제일로 번화한 곳에 자리한 것이 양복점들인데 이제 그곳뿐 아니라 어느 곳이고 양복점들은 중앙 통은커녕 변두리에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양복 수선 집이 간간이 거리에 띌 뿐이다. 대신으로 기성복 차림이거나 케쥬얼 복장이 흔하고 뽐을 내는 세상이다. 옷을 가지고 폼을 잡거나 튀어 보이려 한다면 지금은 개성 강한 케쥬얼의 몫이다. 예전엔 년에 너댓번 입을까말까한 나들이 옷이었는데 이제 양복은 착실한 월급쟁이들이나 아니면 조폭들이 정중하게 형님을 섬긴다는 의미로서 차려입는 것이 되어 버렸고 형식과 예를 갖추어야 할 위치에 처한 공인들의 평상복이 되어 버렸다.
그러해도 양복은 예나 다를 바 없이 차분하여지는 마음의 기본이 배어있는 단연 격식 있는 옷이다. 형식으로서 정중하며 실질적인 예도로서 고상한 품위를 지녔다. 노인이 양복을 쭉 빼입고 걷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 장중하면서도 깊은 정서를 갖고 있는 듯 보인다. 반면에 똑 같은 사람이라도 잠바를 걸치고 가는 것을 보면 괜스레 더 늙수구레하고 초췌한 느낌이 든다. 아내가 요즘 내게 양복을 권하는 것이 아마도 그런 느낌에 연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아내의 양복에 대한 강요는 더 드세지리라. 하지만 이토록 옷에 성화를 부리는 아내가 초라한 복장으로 나서도 별 말이 없는 때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찾아오지는 않을까 . 어느 시들한 계절쯤엔 옷에 전혀 민감할 필요가 없는 시간도 자연 존재할 것이다. 그런 헐벗은 시간에 놓여서는 허수룩한 잠바같이 축 처진 형태의 삶은 별 다른 절충 필요없이 스스로 평형이 이루어져 양복이란 것이 어느 의미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푸른 잎이 때 되어 흩어지는 낙엽이 되는 이치와도 같이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인생의 수순이 아니던가. 옷에 대한 아내의 열의와 양복에 길들여진 나로선 어쩌면 그것으로 더욱 비참해질지도 모른다. 아니 아내는 처참해 질 것이다. 그럴 것이라면 양복은 이쯤 그만 벗어던지는 것이 차라리 나은 선택이 아닐까. 어쨌거나 지금 나는 몸은 내 몸이지만 내 옷은 아내의 소유로 나는 아내의 둘도 없는 모델이다. 속박이라 할 투정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정중히 나를 모시는 양복과 아내가 있으며 그들로서 궁색한 내가 그나마 달리 보인다는 것은 큰 혜택이고 행운이다. 그러기에 그들을 실망시키거나 쉽게 단념시켜서는 아니 되리라. 요즘 양복을 군소리 없이 잘 입는 것은 다 그러한 이유에서다. 옷에 있어서는 나는 자수성가를 감히 생각지도 않는다. 그런 나는 오늘 하늘 닮은 푸른 빛으로 하나 차려 입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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