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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25년 / 최민자

25년 / 최민자

 

 

오랜만에 명동에 나왔다. 성당 앞 호텔에서 열리는 저녁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했던 거리. 잃어버린 시간의 편린이라도 찾을까 싶어 나는 천천히 거리를 더듬었다.  

 저만치 길모퉁이에 지난날 몸담고 있던 금융회사 건물이 보였다. 분칠이 벗겨진 중년여인처럼 초췌하게 서 있는 그것은 그 시절 명동에서는 가장 멋진 건물이었다. 남녀 구분 없이 공채사원을 뽑는다는 말에 무조건 입사지원서를 냈고, 그 뒤 삼 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싸다는 명동 복판 땅을 밟고 다녔다. 스물다섯 해 전, 스물다섯 살 무렵의 일이다.  

 거리는 옛날 그대로였지만 업종도 간판도 바뀌어 있었다. 구둣가게와 미용실, 줄을 서야 사 먹던 도너츠 가게도 사라지고 없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파출소뿐, 오가는 사람들도 옛 모습이 아니었다. 엉덩이가 예뻤던 희랍다방의 마담과, 하얀 실크 타이차림으로 커피를 거르던‘가화’의 주방장은 어디에서 어떻게 늙어가고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 주인공 뿐 아니라 주인공이 살던 무대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 그것이 인생인 모양이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으므로 길 가 돌 의자에 걸터앉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젊은이들이 일렁이는 수풀처럼 싱그러웠다. 붐비는 인파 속에 떠밀릴 때마다 나는 얼마나 이 거리의 자유와 활기를, 대도시의 익명성을 사랑하였던가. 한 그루 누리시든 떨기나무 같은 나도 울창한 숲 사이에 끼어 있으니 절로 푸른 물이 드는 것 같았다.  

 다시 물릴 수 없는 젊음의 시간들을 팔아 내가 산 것은 무엇이었던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는 몇 벌의 옷과, 결혼 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였던 적금통장과, 향기가 바래버린 몇 컷의 추억 말고 또 무엇이 있었던가. 사람들은 고귀한 젊음을 팔아 노후의 안락함을 사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밑지는 장사인지는 세월이 한참 흘러봐야 안다.   

 일요일 오후여서 짝을 지어 길을 걷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어디서 저렇게 어울리는 짝들을 찾아내었을까. 긴 머리 여자와 어깨를 겯고 걷는 키 큰 청년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느 새 저 정도면 사윗감으로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 처녀가 스물다섯 해쯤 뒤, 스물다섯 살쯤의 청년을 같은 거리에서 바라보며 하는 생각이 이렇게 달라져 버리다니. 세월만큼 무자비한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스물다섯 살 남자가 스물다섯 해 뒤에 스물다섯 살 여자를 바라보아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될지 어쩔지, 그것이 왈칵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