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꼬 / 배단영
식전 댓바람부터 고함소리가 오갔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남편과 서로 큰소리를 내다보니 별것 아닌 일이 별것이 되고 말았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남편이 언제부터인가 편하다는 이유로 티셔츠만 입고 사무실로 나가기 시작했다. 날씬한 사람이야 뭘 입어도 맵시가 나겠지만 뚱뚱한 남편은 펭귄처럼 배만 툭 튀어나와 웃겨보였다. 걸음걸이마저 뒤뚱거리는 듯이 보여 한소리 안할 수가 없었다. “반듯하니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나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반발이라도 하듯이 굳이 티셔츠를 입고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는 사람생각도 좀 하지.”라고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아침을 망쳐버렸다.
큰소리를 치다보니 감정이 격해져 내가 잘났느니 네가 잘났느니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면서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오가고 말았다. 케케묵은 일까지 들추어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한 순간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주춤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되어버렸다. 등교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아이들은 웬 날벼락인가 싶어 방문을 걸어 잠그고나올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그것조차 화가 나서 아이들에게까지 고함을 지르고야 만다. 출근해서 일해야 할 사람, 학교 가서 열심히 공부해야 할 아이들까지 세탁기에 막 꺼낸 남방처럼 구겨진 인상을 한 채 현관문을 나선다.
그렇잖아도 식구가 많아 비좁은 자가용이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졌다며 투덜거리는 아이들로 인해 공기가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시작된 하루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입은 옷처럼 종일 뒤틀리고 사소한 것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십상이다. 뒤늦게 하루를 망쳐버린 것이 내 탓이라는 걸 깨닫고 후회하지만 쉽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끙끙거린다. 대부분의 일은 참을성이 부족한 나의 선정 탓에 싸움이 생긴다. 혹은 이번 일처럼 소통의 장애로 서로가 속상하게 되기도 한다. 부족한 나 자신을 돌아보다 아버지를 떠올린다.
한여름 무더위에 가뭄이 길어지다 보면 논에 물 대는 일로 이웃끼리 다투는 일이 종종 생긴다. 논이나 채소를 심어놓은 밭과 매한가지로 속이 타는 농부들의 심정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턱턱 갈라질 때쯤 생기는 일이다. 유월이면 모내기를 끈낸 모들이 쨍쨍한 햇볕을 받으며 심지를 굳혀 가는데 물 또한 없어서는 안 될 생명의 젖줄이라 그 시기엔 농부들 사이에 물꼬 트는 일로 서로 신경전을 벌이곤 하는 것이다. 내 논에 물들어 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숟가락 들어가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할 만큼 농사는 종부들의 목숨과 같은 것이다.
예전에 친정아버지도 마을에 이장으로 지내던 이와 옥신각신 한 적이 있었다. 마침 집 논이 우리 논과 위아래로 경계를 하고 있어 그 집 논에 물을 채우고 나서야 물꼬를 틔울 수가 있었다. 어느 날 가뭄에 서로 나누어야 할 물을 밑도 끝도 없이 자기 논에만 채우는 이장을 보며 눈치만 보고 참던 아버지가 화가 잔뜩 나셨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다가 해거름이 되자 분을 삭이지 못한 아버지가 달려가서 다짜고짜로 이장의 멱살을 잡았다. 서로가 체면도 잊어버리고 멱살잡이에 험한 말까지 오가자 구경거리가 생긴 동네사람들은 싸움구경에 신이 났다.
평소에는 동네일을 내 집일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나며 해결해 주던 평판 좋은 양반이지만 갑작스런 멱살잡이를 당하자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서로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서넛 있어 패대기를 치는 정도까지 가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싸움을 말리던 몇 사람은 “무슨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생겨 원숭이 구경하듯 하느냐.”며 사람들을 헤치고 나왔다. 그 자리를 작파하고 나선 사람들은 두 사람을 데리고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막걸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싫다 좋다는 말씀도 없이 코를 골며 주무셨다. 뒷날은 별일 없었다는 듯이 논일이며 밭일을 하시고 이장을 만나 잡담까지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막걸리 집에서 분명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는데 말씀이 없이 궁금하던 차에 해가 뉘엿할 때 즈음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께 냉수를 한 사발 가져다 드리고는 슬쩍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아 글케 그 이장 집에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이것이 문제였던기라.”
아버지는 물 한사발을 더 들이키시고는,
“난산이라 앞다리부터 안 나오고 두시다리가 쑤욱 뛰어나와서 쥑이는 줄 알았다네. 그래서 송아지 낳는데 정신을 쏟다보니 제 논에 물을 좀 대고 물꼬를 틀어 내 논에도 물을 대준다는 것이 늦어진 것이제.”
나의 반문이 쏟아졌다.
“그라믄 이장 어른은 왜 멱살까지 잡혀가며 소가 새끼 낳는데 난산이라 늦어졌다는 이야기를 안했대요.”
얼굴이 붉어진 아버지는
“내가 순간적으로 너무하는 거 아니냐며 다짜고짜 덤비니 저도 속에 천불이 나니 고함만 지른 것이지.”
모든 것이 너무나 간단명로하게 끝이 났다. 그 후로 두 분은 싸우기 이전처럼 붙어 다니시며 동네일이며 개인사를 논하시곤 하셨다.
한동안 봄 가뭄으로 산불이 연일 발생되더니 오늘 아침은 크산티폐의 얼굴표정을 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흙먼지 냄새가 폴폴 나더니 땅은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내리는 비가 반가운 손님처럼 느껴진다. 마른 나뭇가지들도 봄비에 새순이 돋아 더욱 활개를 치며 환한 꽃등을 피울 것이다. 메마른 땅에 바람이 불어와 먼지를 일으키듯 소란스런 나의 행동이 경거망동처럼 느껴진다. 민망하기도 하고 속도 상하지만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것을 난다. 나는 익숙한 전화번호를 돌려 한마디 툭 던져본다.
“저녁에 술안주로 제육볶음 해놓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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