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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나의 양복 변천사 / 무라카미 하루키

나의 양복 변천사 /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밴 재킷에 회색 헤링본 (역주 : 삼목잎 모양의 줄무늬를 짜넣은 무늬) 슈트 였다. 셔츠는 흰색 버튼다운이었고, 넥타이는 검은색 니트. 아이비 전성 시절의 얘기다. 나는 헤링본이라는 무늬를 굉장히 좋아해서 맨 처음 양복을 산다면 이거여야만 된다고 늘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헤링본 양복이란 건 열여덟 살 난 남자에게는 별로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헤링본을 입으려면 역시 나름대로 연륜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로 구입한 양복은 결혼할 때 산, 은은한 올리브그린의 영국식 스타일 스리피스로, 이것은 - 본인이 말하긴 좀 뭣하지만 - 퍽 잘 어울렸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가 길고 지금보다 한결 말랐으며, 얼굴에서는 나름대로 굳은 결의 같은 걸 엿볼 수 있었다. 스물두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취직이란 걸 한 적이 없으므로 세 번째로 양복을 산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스물아홉 때 우연히 응모한 '군조'라는 문예지의 신인상에 당선 (이라고 할까?) 되어, 시상식에 나가기 위해 일부러 여름 양복을 산 게 세 번째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양복에 대한 동경,집착 같은 게 이미 말끔히 사라졌으므로 되도록이면 값싸고 적당히 질 좋은 것을 사려고 마음먹었었다. 그 당시에는 나도 꽤 잘난 척을 했던 터라, 문예지 신인상 시상식 같은 데 나가기 위해 촐싹대며 비싼 양복따위를 살까 보냐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건방졌던 것 같다. 하긴 지금도 여전히 건방지긴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한테는 당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양복을 살까 하고 산책 겸 아오야마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자니, 옛날 밴 빌딩에서 도산 바겐세일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아니, 밴도 망해 버렸나,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옛날에 유행하던 스리 버튼의 면 양복을 팔고 있었다. 올리브 그린으로 값은 1만 5,000엔, 굉장히 쌌다. 그걸 사가지고 돌아와서 세탁기에다 빨아 구깃 구깃하게 만들어 낡은 테니스화를 신고 시상식에 나갔다. 지금 나의 양복장 -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 에는 한 벌의 양복밖에 없다. '폴 스튜어트' 에서 산 검은 양복뿐이다. 이것은 순전히 관혼상제용으로, 아직 한 번밖에 입지 않았다. 앞으로도 양복을 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귀찮은 옷은 입지 않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값은 비싸지, 활동하긴 불편하지, 금방 스타일이 바뀌고, 드라이 클리닝비도 든다. 간혹 양복을 입고 나가고 싶기도 하지만 두시간 정도 걷다 보면, 아아 싫다, 이런 걸 입고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양복은 너무도 부자연스런 옷이다. 넥타이를 맬 필요가 있을 때는 전부 블레이저 코트로 한다. 나는 브룩스 브라더스의 블레이저 코트를 좋아해서 이래저래 여섯벌이나 사고 말았다. 넥타이를 매는 건 두 달에 한 번 정도니 좀 너무 많이 산 감도 들지만, 옷값이란 게 거의 들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의 사치는 괜찮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더 블레이저 코트를 입고 호텔 로비에 멍청히 서 있으면 플로어 매니저로 오해 받는 일이 있다. 오사카의 로열 호텔에서는 세 번이나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정말이지 넌덜머리가 났다. "어이, OO실 준비는 다된 거야?" 라는 말 따위, 그런 걸 알턱이 없잖은가? 양복 얘긱와는 관계없지만, 나는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다. 한번은 이케부쿠로의 도부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데, 아르바이트 종업원으로 착각을 했는지 높은 분인듯한 아저씨가 "이봐, 넌 왜 명찰을 안 달고 있는거야!" 하고 야단을 쳤다. 하도 기가 막혀서 나도 얼떨결에 "옛!" 하고 있는 사이에 상대방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도부 백화점에 특별히 원한이 있는건 아니지만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경험이다. 여담은 그만하고 양복 얘기로 돌아가자. 나 자신은 거의 양복을 입지 않지만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을 보는 건 또 그 나름대로 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역시 연륜이 쌓여야 하고, 철학도 필요할 것이다. 나는 둘 다 없으니까 좀처럼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을 수가 없다. 미국 화장품 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던 고(故) 찰스 렙슨 회장은 일생 동안 다크불루 슈트만 입었다고 한다. 그는 빌 피올 라반티라는 디자이너에게 약 200벌의 다크블루 슈트를 만들게 해서 그것을 차례대로 입었다고 하니까, 여기까지 이르면 이미 철학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다. '에스콰이어'지에 따르면 다크블루라는 색깔은 일종의 권위와 힘을 두드러지게 해서,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열심히 뛰고 있다!' 라는 인상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과연 당대에 렙슨 제국을 쌓아 올린 인물답게 색깔 감각이 뛰어났다. 그 얘기를 읽고부터는 거리에 나서면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다크블루 슈트를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는 별로 없다. 확실히 다크블루 슈트를 세련되게 입기란 까다로운 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