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환기시키는 죽음 / 임매자
여러 해 전 유럽 여행 중 본의 베토벤 생가에서 그의 데드마스크를 본 적이 있다. 전시실엔 베토벤의 생전의 얼굴과 사후의 얼굴이 각각 석고에 떠져서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생전 얼굴은 활기와 열정으로 뭉쳐놓은 매력적인 모습이었으나, 사후 마스크는 굳고 엄숙했다. 그러나 그는 그 굳은 얼굴로 무언가 많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그의 데드마스크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돌연 장중한 <운명 교향곡>의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귀머거리가 된 후 이 곡을 작곡했다니 그의 천재성은 실로 놀랍다. 그 앞에서 갑자기 나는 이렇게 혼을 울리는 글 한 편 남기지 못하고 생의 문을 닫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턱까지 차올랐고, 어떤 열망이 축문처럼 그의 주검 위를 맴돌다가 사라졌다. 나는 왜 하필 그의 죽음 앞에서 문학에 대한 열망에 불타야 했던지.
노르웨이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서 나는 다시 한 예술가의 사후의 모습을 만났다. 화가인지 사진작가인지 구별이 되지 않게 많은 사진을 남겼던 뭉크는 자신의 사후의 모습도 사진으로 남겼다. 넓은 미술관을 돌아 나오는 길목에 걸린 사진 속의 뭉크는 침대에 단정히 누워있는 딱딱하게 굳은 옆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생전에 드높은 인기를 누렸던 만큼 자신을 영원토록 기억해 주길 바랐던 것일까.
그는 유난히 죽음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작품 속의 주검들은 봄이 되어 벗어버린 겨울 외투처럼 칙칙했으나 그의 사후 사진을 호위하고 있는 많은 작품 속에서 그 사진은 당당하게 빛났다. 그는 나를 자신의 치열했던 작품 세계로 끌고 들어가 그 앞에서 감동에 젖어 오래도록 서있게 만들었다. 자신은 침대에 누운 채로.
그렇다. 그들은 죽음으로 건너가면서까지 깊은 울림을 메시지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만난 독일의 사진작가 발터 셀스. 그는 1년 동안 호스피스로 일하며 시한부 환자들의 생전과 생후 사진을 찍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냈으며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진들에 나타난 죽기 전의 모습에는 대부분 노인네 특유의 인자함이 느껴졌으나 사후의 눈감은 모습은 으스스했다. 시반은 죽은 지 몇 시간 후부터 피부에 생기는 자색의 반점이고 사강은 죽은 후 근육이 굳어지는 현상이다. 자색의 반점을 띤 굳은 모습들은 엄숙하고 무서웠다. 사후의 사진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다른 세계로 건너서는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바뀌는구나 하고 착잡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남아 있는 시간의 귀중함과 죽음이 끝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잠이 든 것처럼 평화로운 사진이 있는가 하면 고통스러웠던 투병기간이 고스란히 투영된 사진도 있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한 사람의 생애를 하나의 문장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바로 그 마침표일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해 마침표가 찍히면 삶이란 더 이상 고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문장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르네상스 미술을 화려하게 꽃피운 미켈란젤로는 90세까지 장수했으면서도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야 조각을 조금 안 것 같은데 죽어야 하다니”하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들라크루아는 “나는 이도 다 빠지고 숨도 제대로 못 쉴 때가 되어서야 그림을 발견했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삶과 죽음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났으니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인 만큼, 그것은 바위보다 단단한 침묵이고 단호한 숨의 멈춤인 한편 죽음만큼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일깨우고, 눈부시게 ‘삶’을 환기시켜 주는 것도 없을 것일 터.
얼마 전 타계한 박경리는 <<토지>>의 연재를 시작한 지 두 해가 못 된 1971년 암 수술을 받았다. 그 작품이 바로 그러한 죽음에서 비롯했기에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강렬한 희망이 <<토지>>의 세계를 일관한다. 죽음의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삶의 표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토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아름답고 활력 넘치는 삶은 바로 박경리가 그 죽음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 봤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사춘기부터 가족들의 죽음에 힘겹게 끌려 다니다가 놓여날 즈음 또 하나의 죽음을 맞이했던 나 역시 죽음과는 퍽 친숙하다. 그렇지만 죽음을 인식하면서 삶을 통찰하고 이를 통해 다시 희망을 빚는다고 하지 않던가.
육신은 기한이 다 되면 잠자는 듯 곱게 흙으로 돌아가 자연의 품에 안기는 것이 정한 이치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동안 헛된 욕망의 뒷자락만 잡고 살아오다가 죽음을 접하고 나서야 남은 시간을 아름답고 활기찬 삶의 치열한 불꽃으로 피워 올리고 싶어졌다.
기억은 어떤 작은 계기를 통해 마음 속 심연으로부터 끌려나오고, 그 기억은 다시 기억을 낳는다. 마치 그물코를 잡아당기면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이 모두 걸려나오듯이. 인터넷에서 발터 셀스의 사진들을 보면서 베토벤과 뭉크의 사후 모습이 떠올랐으며 예술에 대한 열망을 다 태우지 못하고 마침표를 찍어야 했던 그들의 안타까움이 내안으로 녹아들었다. 베토벤과 뭉크의 칙칙한 죽음의 메시지 앞에서 덧없이 시간을 죽이며 느적댈 수 없다는 긴박감을 느끼며 글을 쓰기 위한 각오를 다졌던 그 시절로 발터 셀스의 사진들은 나를 다시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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