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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아리산 송(頌) / 구양근

아리산 송(頌) / 구양근

 

 

 

 

아리산阿里山 가는 길에 줄지어 선 진빨강 벚꽃은 어느 곳에서도 구경 못하던 귀물이다. 새색시 앞에서 뿌리고 간 화동의 꽃잎 같이 줄 곳 이어지고 있다.

고산을 굽이쳐 오르는 고부랑 길은 발끝이 가물가물 가려워 온다. 온 산을 뒤덮고 있는 다원茶園은 아시아인을 다 먹여도 남을 만큼 풍성하다. 쨍그랑 깨질 것만 같은 파란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광활한 공간이다. 직선으로 하늘로 내 뻗은 전나무, 측백나무는 하늘을 따라 한없이 자라고만 있었다.

일출을 보기 위해 모여 든 군중, 검푸른 하늘에 모래를 뿌려 놓은 듯 펼쳐진 별들의 세계, 그 가운데 소 눈깔만한 샛별이 두둥실 중천에 걸려 있다.

군중은 엄숙한 한 장면을 보러 무언의 긴장감이 감돈다. 동쪽의 삼각산에 양쪽으로 약간 밝음이 비치더니 점점 삼각산이 달아오르며 양쪽의 하얀색이 잦아든다. 1시간도 더된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천천히 지구의 자전이 계속되고 있는 숙연한 순간이었다. 인생이 이 장엄한 우주의 일부라 생각이 들며 아주 소중한 존재라고 느껴진다.

드디어 새어 나오는 강렬한 광채! 몇 만도 용광로가 직선으로 작열해 올 때 나는 눈을 감지 않고 기어이 바라보았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햇살의 줄기가 있음을 알았다. 잡으면 잡힐 것 같은 햇살이 분명 선명한 선으로 내 눈까지 이어졌다. 작열하는 빛 속의 불덩어리는 차라리 약간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일출을 한국의 해수욕장에서도 보았고, 낙산사에서도 보았고, 금강산에서도 보았지만 이렇게 천천히 사람의 오금을 펴지 못하게 조여드는 긴장감은 처음이다. 감히 인간이 범접하지 못할 자연의 법칙을 직접 체험하고 있었다.

이 장관을 보기 위하여 모여든 군중은 만족한 마음을 안고 천천히 산상 산림철길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리산의 꾸냥!’ 이 노래는 내가 50년 전부터 부르던 가사이다. 그 노래를 부르며 얼마나 아리산을 와보고 싶었던가. 아리산의 아가씨는 물처럼 아름답고 아리산의 소년은 산처럼 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아리산 중턱의 분기호奮起湖는 산상 마을이다. 분기는 원래 삼태기를 중국어로 분기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인데 이름이 고아하지 못하다고 해서 같은 음의 분기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호자가 있다고 해서 호수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마을이 마치 삼태기 호수처럼 생겨서 지어진 이름일 뿐이다. 온갖 상품이 진열되고 골목이 형성된 마을이다. 이렇게 높은 곳에 이런 산상마을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아리산을 내려온 다음 목적지는 르웨탄이다. 나는 이 곳을 스물다섯의 청년 때 와보고 이번에 다시 찾은 것이다. 그 때 관광객을 위하여 고산족 복장을 하고 사진촬영을 해주었던 아가씨들이 지금도 살고 있을까? 나는 그 한 장의 사진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국제유학생들이 반공청년 구국단의 알선으로 대만일주 여행길에 올랐을 때 찍은 것이다. 7-8명의 각국 유학생들이 고산족복장을 빌려 입고 고산족 아가씨들과 마치 옛날부터 친한 사이인 것처럼 손도 잡고 어깨동무도 하며 찍은 것이다. 한 아가씨는 나에게 바싹 다가서서 내 옷자락을 만지며 서있지 않은가. 아마 그 아가씨들을 찾아보면 지금쯤 손자도 보았을 나이일 터인데. 아니면 지금도 그 곱던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그런 사진을 들고 찾아가서 그분들의 소식을 일일이 알아보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되어 있기도 하고 미국에 이민 가 있는 분도 있고 지금도 상가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분도 있더란다.

르웨탄 가는 길에 나는 전에 보지 못하던 어떤 나무에 자꾸 시선이 갔다. 마치 과수원에서 큰 과일을 하얀 종이에 싸 놓은 듯한 모습이 가끔씩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나무는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가끔씩 산중턱에 홀로 서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만약 사람이 재배한 것이라면 반드시 군락을 이루고 있을 터인데 야생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드디어 나는 그 나무의 정체를 알아냈다. 르웨탄을 건너 산비탈 관광마을로 들어섰을 때 상가 앞 길가에 바로 그 나무가 서있지 않은가. 사람 키 대여섯 배쯤 되는 튼실한 나무인데 나무줄기에는 소뿔처럼 생긴 큼직한 사나운 가시가 촘촘히 솟아 있어 동물이 나무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자세히 가까이 가서보니 작은 수박덩이만큼이나 큰 하얀 솜덩이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고 주먹만 한 과일도 가끔 달려 있었다. 그 과일이 시간이 지나면 벌어져 솜덩이가 되는데 그것은 날씨가 되어 하늘을 날아 종족 번식의 수단이 되고 있었다. 그 나무의 이름은 미인수美人樹, 그 꽃 이름은 목면화木棉花, 이름이 한 치도 틀림없이 제대로 모양을 형상하였다. 그렇다 꼭 인공 솜을 뭉쳐 놓은 듯한 남국의 꽃이었다.

르웨탄이 인공호수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해발 7백 미터가 넘는 산상에 이렇게 바다를 연상하리만큼 거대한 호수가 생긴 것은 일제시대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15길이나 되는 자하수로를 뚫어서 물을 끌어들여 만들어 놓은 호수란다.

한국인들이 대만에 와서 놀란 사실은, 대만인은 일본에 대한 인상이 너무나 좋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일분의 지배를 받은 곳인데 우리와는 달리 자기를 통치한 자를 좋아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맨발벗고 창을 들고 산토끼나 쫒던 이들에게 2천 미터가 넘는 산위에 뚜! 하고 소리 지르며 달리는 산상철로를 건설해 주는가 하면 이처럼 현대인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산상호수를 건설해 놓았으니 일본인이 진심으로 고마울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추측해 본다. 아리산과 르웨탄은 대만 경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진수이다.